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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Jul 25. 2023

생일 전날이 죽기에 가장 좋은 날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이 뭘까?’ 긴 삶을 살아오면서 ‘행복’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행복’이란 화두로 가장 큰 깨달음을 주는 존재는 대단한 책도 아니고 훌륭한 위인도 아닌 바로 아홉 살짜리 아들이다. 아직 어리기만 한 아이이지만 ‘행복’이란 주제에 대해서는 반백년을 산 나보다 스승일 때가 많다.   

  

 지난해 추석, 전라도에 사는 우리 가족은 서울 친가와 대전 외가를 다녀오는 장거리 이동을 했다. 아이가 무리를 했는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복통을 호소하며 괴로워했다. 약을 먹이고 따뜻한 잠자리에 눕힌 후,‘엄마 손은 약손’ 노래를 부르며 배를 살살 문질러 주었다. 배를 문지르며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양가 할머니들을 막 뵙고 온 터라 자연스럽게 할머니들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전환되었다.

“대전 할머니, 서울 할머니 두 분 다 많이 아프셔. 어쩌면 아주 오래 사시지는 못 할지도 몰라.”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 나는 아주 많이 슬플 거 같아.”

“그래, 엄마도 정말 슬플 거야. 그래도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단다.”   

  

 4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들의 나이는 5살이었다. 처음으로 죽음을 목격한 아이는 큰 충격을 받았는지 장례식 이후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죽음은 무엇이며, 죽은 뒤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무척 궁금해했다. 아이는 어느 날 내게 이렇게 물었다.

“엄마, 죽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 아냐? 그냥 사라져 버리는 거 아니야? 죽은 뒤에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 건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 아닐까? 난 죽는 게 무섭고 싫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솔직히 고백하는데, 실은 엄마도 잘 몰라. 이 세상에 아무도 죽어 본 사람은 없거든.”

 

나는 과거의 대화를 떠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빠져서 아이의 배를 설렁설렁 문지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아이가 말했다.

“엄마, 근데 나는 할머니들이 ‘생일 전날’에 돌아가시면 좋겠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생일 전날이 세상에서 가장 설레고 행복한 날이잖아. 죽더라도 가장 행복한 날에 죽으면 좋을 거 같아. 죽은 뒤는 아무도 모르잖아. 하지만 불행하게 죽는 건 싫을 거 같아.”

“그러게. 네 말이 맞다. 엄마도 할머니들이 가장 행복한 날에 돌아가시면 좋겠구나. 진짜로.”    

 

출처 Pixabay

 

 아이의 생각도 못한 대답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그리고‘생일 전날’이라는 말 한마디가 너무도 강렬하게 와닿았다. 아이는 1년에 한 번뿐인 생일을 매해 손꼽아 기다리곤 한다. 그날만은 자신이 온 세상의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맛있는 것도 먹고, 오랫동안 갖고 싶어 했던 장난감도 선물로 받게 되는 최고로 멋진 날이다. 하지만 아이는 8년여의 인생을 살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생일날보다 오히려 바로 전날, 설렘과 기대가 풍선처럼 한껏 부풀어 올라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생일 전날, 크리스마스 전날, 소풍 전날, 소개팅 전날, 첫 출근 전날, 결혼식 전날’에 얼마나 설레고 행복했었는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가장 행복한 날을 고르라고 하면 생일날을 고르지 생일 전날을 고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음이 아는 걸 머리로는 미처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매일을 '생일 전날'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생은 언제나 빛나고 설레며 행복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일이 되어야만 행복할 거라고 믿는다. 나부터도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다. 미래에 무언가를 이루거나 가져야만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지금 이 순간은 외면하거나 멀찌감치 방치해 둔 채로 말이다.       


 천진난만한 아이를 통해, 행복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간절히 소망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막상 얻고 나면 기쁨은 물거품처럼 사그라지기도 한다. 소망하는 것을 얻기 직전까지 기다리고 갈구하는 마음이 한없이 충만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바라던 것을 얻은 후에 오는 것일까, 전에 오는 것일까.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 있다는 당연한 진리가 가슴속에서 메아리치듯 들려온다. 무언가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삶은 늘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죽더라도 가장 행복한 날에 죽으면 좋겠다는 아이의 말도 되새겨 본다. 세상에 죽기에 좋은 날이 있을까? 그러고 보니 살면서 단 한 번도 죽기에 좋은 날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해야 할 일, 이루고 싶은 일들에 매몰되어 지금 이 순간의 행복도, 언젠가 맞이해야 할 죽음도 너무나 멀리 제쳐두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본다. 가장 행복한 날이 죽기에도 가장 좋은 날이라니 얼마나 멋진 말인가? 행복하게 죽을 수만 있다면 몇 년을 살다 죽는다 한들 무슨 여한이 남을까 싶다. 죽은 뒤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아니면 영원히 사라지게 될지 모르지만, 불행하게 죽는 건 그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날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행복한 날은 미래의 언젠가가 아니라 매일매일이 될 수 있음을 아는 것이 출발점일 것 같다. 소망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날들을 산다면 늘 설레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미래의 무언가를 위해 현재를 담보하거나 희생하는 삶이 아닌, 미래와 현재를 더불어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눈부셨다.’라는 드라마 속 유명한 대사처럼 우리 삶은 모든 날들이 충분히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리고 그렇게 산다면 우리는 언제 죽어도 행복한 날에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가장 행복한 날이 죽기에도 가장 좋은 날이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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