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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Jul 30. 2023

글을 쓰면 변한다. 악몽도 나 자신도!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글쓰기와 무의식은 관련이 있다

십여 년째 똑같은 악몽을 꾸고 있다. 동일한 상황, 유사한 패턴의 악몽이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다. 그럼에도 꿈속에서 나는 늘 두렵고 불안하고 초조하다. 꿈속에서 이것이 늘 반복되던 꿈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아차렸던 때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꿈의 내용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부터 삼십 대 초반까지 교사를 했다. 지금은 사십 대 후반이니 교사를 그만두고도 무려 15년 이상이 지난 셈이다. 그런데 나는 십수 년째 똑같은 '학교 악몽'을 꾸고 있다. 프로이트가 나와 만난다면 '당신의 무의식에는 어마어마한 트라우마가 잠재되어 있다.'라고 진단할지도 모르겠다. 억압된 욕망이나 불안이 꿈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라면 나는 대체 무엇이 그리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내면 깊숙한 곳에 억눌려 있는 것일까? 왠지 그것은 아주 오래전 침몰한 난파선의 잔해처럼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될 비밀인 것만 같다.


악몽에서 나는 언제나 교사로 돌아가 있고 내가 있는 곳은 늘 학교이다. 물론 일상적인 학교 건물은 아니다. 나로선 도무지 알 수 없는 구조의 건물 안에 수많은 교실들이 촘촘히 들어앉아 있다. 쉬는 시간이면 나는 미친 듯이 교실을 찾아다닌다. 아무리 헤매고 다녀도 찾으려는 교실은 보이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는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치고 다른 교실엔 모두 선생님들이 들어가 있는데 나만 혼자 복도를 한없이 배회하는 때이다. 교사가 없어 어수선해져 있을 교실 풍경을 떠올리면 마음이 한없이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하지만 교실은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날은 극적으로 교실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면 나는 어김없이 수업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 진도도 잘 모르고 무엇을 어떻게 수업해야 할지 막막하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한 시간을 대충 때운다는 것은 임기응변에 약한 나로서는 엄두도 안 난다. 답답하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쩔쩔매다가 잠에서 깨곤 한다.  

출처 Pixabay


그런데 어젯밤 꿈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참을 헤매고 다니다가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교실을 찾아냈고, 수업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음에도 어떻게든 수업을 끝까지 끌고 나갔다. 약간의 버벅거림이 있었고 몰래 시계를 훔쳐보기도 했지만 결국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나는 아이들과 무언가를 해냈다. 지금까지 이런 꿈은 단 한 번도 꾼 적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처음 든 생각은 '또 같은 악몽을 꾸었구나!' 하는 실망감이었다. 비교적 잘 살고 있는 나날들 이건만 가끔씩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듯한 기분이 드는 날이 있다. 이 악몽을 꾸는 날이면 사소하지만 불쾌한 감정에 하루가 찜찜하게 흘러가곤 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꿈의 내용이 생생히 되살아났는데 어제의 꿈은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내가 꾸어 온 꿈과는 확실히 달랐다.


나는 정신과 의사도 심리학자도 아니기에  꿈을 정확히 분석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날에는 수박 겉핥기식으로라도 에 대한 탐구를 시도해봐야 하지 않을까? 지난 십수 년 동안 나의 무의식은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잘 알아듣지 못하니 꿈의 형태로 슬며시 접근했을 것이다. 나의 무의식은 나의 의식과 어떤 대화를 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늘 무언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주로 내가 책임을 느끼는 일들에 대해서 그랬다. 다른 말로 하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들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 무언가에 결코 닿을 수 없다는 불안과 초조를 동시에 느꼈던 것 같다. 의식적으로는 물론 알지 못했다. 나는 바람과 성취가 그럭저럭 잘 이어지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은 애초에 탐하지도 않거니와 한 발 물러나 무관심해지는 태도로 심리적 안전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나에게 무의식은 이따금 노크를 했던 것이다. 너는 아닌 척, 아니 잘난 척하지만 실은 무척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워하고 있다고.


단 한 번도 내 악몽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교사를 하던 시절이 내 삶의 암흑기였던 때와 겹치기에 이런 악몽을 꾸나보다 하고 가볍게 넘겨버리곤 했다. 사람은 누구나 나쁜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는데 무의식은 잔인하게도 그 기억을 끄집어내어 자아를 괴롭히는가 보다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해결된 문제였다면 아마 꿈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교사 시절의 삶을 패배한 삶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내 의지로 사직을 하였지만 내 안엔 깊은 좌절감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유독 교사 시절의 꿈만 꾸고 또 꾸는 게 아닐까. 진실로 나는 지금까지 이러한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이 또한 놀라운 발견이다.


어젯밤 꿈속의 달라진 나를 통해 불현듯 깨달았다. 내 안의 오래된 난파선이 수면 위로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나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먹은 순간 십여 년 동안 깊게 박혀 있던 닻이 뽑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그간 반복되어 온 자기 성찰적 글쓰기가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놀라운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십 수년 동안 복사판 같이 반복되던 꿈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국 내 안의 내가 변한 것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길이 없다.


나의 지독한 불안과 초조, 두려움이 난파선의 잔해와 함께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그리고 조금씩 무의식의 바다 위에서 증발해가고 있다. 나 자신이 용납하지 못했던 실패와 좌절도 차츰 스스로에게 용서받고 있다. 이 모든 건 의식의 차원에서 벌어진 것은 아니기에 더 놀랍고 감동적이다.


누군가에게는 시시하거나 사소할 수 있는 악몽 이야기를 여기 적은 것은 '글쓰기의 놀라운 효과'를 말해주고 싶어서이다. 그렇다고 내가 악몽을 주제로 악몽을 해결하기 위한 글쓰기를 해온 것도 아니다. 소재 불문, 내용 불문 하고 그저 글을 썼을 뿐이다. 글을 쓰는 과정은 나의 의식부터 무의식까지 내 전부를 건드리고 있다. 글쓰기 이외에 나를 뿌리부터 흔들 만큼 매진하고 있는 일은 내겐 없다. 매일 쓰기 시작한 건 이제 1년이 되었다. 브런치는 4개월 차이지만 블로그는 만 1살을 맞는다. 블로그 생일을 자축하고 있던 차에 이런 커다란 선물까지 받게 되다니 무척 기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은 나 자신의 아름다운 변화 아닐까? 그것도 '내면이 치유되어 가는 '라니 정말로 짜릿한 일이다. 오랜 악몽에서 처음으로 탈출에 성공한 나는 신이 나서 동네방네 외쳐본다.


"글을 쓰면 변한다. 악몽도,  자신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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