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위 Aug 15. 2023

흔들리는 나를 멈추고 너의 길을 비춰줄게

로이킴의 '북두칠성'

북두칠성


로이킴


외로움에 사무쳐

억지로 몸을 끌고 나와

조용한 카페에 앉아서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다

왠지 나만 이런 것 같아

더 슬퍼오면

주변에 심어진

수많은 나무들을 바라봐

아무도 알아주진 않지만

우뚝 서 있잖아

집에 가는 길엔 나를 그리며

하늘을 바라봐 줄래


북두칠성이 보이니

빛나는 별들을

천천히 이어가며

나를 기다려 주길


북두칠성이 보이니

니가 있는 곳이

어디든 난 따라가

그 길을 비춰줄게


오랜만에 날씨가 좋아

책을 들고 나와

집 앞 공원에 앉아서

책을 읽다 바라본

구부정한 그림자가

오늘따라 더 초라해 보이면

주변에 놓여진

외로운 가로등을 바라봐

아무도 알아주진 않지만

우뚝 서 있잖아

집에 가는 길엔

나를 그리며

하늘을 바라봐 줄래


북두칠성이 보이니

빛나는 별들을

천천히 이어가며

나를 기다려 주길


북두칠성이 보이니

니가 있는 곳이

어디든 난 따라가

그 길을 비춰줄게

그 길을 비춰줄게


https://youtu.be/4iSuSghFi6c


어느 날 오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노래를 들었다. 어떤 노래인가 찾아보니 로이킴의 '북두칠성'이었다. 로이킴이란 가수와 그의 노래를 좋아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노래만은 가슴에 찬물을 끼얹듯 순식간에 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오늘 같이 바람에 찬기가 서려 있는 가을의 문턱에 서면, 조용히 읊조리는 그의 쓸쓸한 목소리가 생각이 난다. 이 노래는 멜로디보다 가사에 먼저 반응했던 것 같다.  '외로움, 나무, 북두칠성, 가로등, 그림자, 길' 이런 단어들에 마음이 반응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 노래는 사랑 노래인 듯하지만 내겐 그렇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흔들리고 있는 누군가에게 전하는 작은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 같다. 외로운 날, 우리는 무작정 거리로 나서곤 한다. 마음이 방황할 때에는 몸도 따라서 방황하게 된다. 이 거리 저 거리 걸으며 흩어지는 마음의 조각들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닌다. 하지만 무거웠던 마음의 한 무더기를 거의 다 헐어내고외로움은 좀처럼 줄어들질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가 휘청이지 않고 똑바로 걷는 사람들뿐이고 나와는 다른 존재들인 것만 같다. 나는 더욱더 초라해진다. 자꾸만 작아지고 움츠러드는 내 모습이 나 조차도 보기 싫다.


그때 거리 가득 서 있는 나무들과 가로등이 눈에 들어온다. 움직임도 흔들림도 없이 묵묵히 서 있는 그 모습에서 나는 작은 위안을 얻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우뚝 서 있는, 단단하고 그들에게 나는 다정한 안부를 건네며  집으로 돌아간다. 거리에 나무와 가로등이 있다면 하늘엔 별이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북두칠성은 언제나 한 자리에서 환하게 길을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나도 북두칠성처럼 누군가의 길을 밝혀 주고 싶다는 생각을 다. 그 누군가는 연인일 수도 있고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존재들일 수도 있다. 우뚝 서 있는 나무와 가로등처럼, 밤하늘의 빛나는 북두칠성처럼 나 자신이 희망의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기를 나지막이 기도하는 것이다.


교사를 그만두고 수녀원에서도 도망쳐 나온 후, 나는 무작정 길을 떠났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낯선 도시, 서울로 갔다. 그리고 나는 몇 날 며칠을 걸어 다녔다. 인사동 거리를 배회하고 덕수궁 돌담길도 걸었다. 한참을 걷다 눈에 보이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그냥 들어갔다. 미술관이 보이미술관에, 도서관이 보이면 도서관에, 카페가 보이면 카페에 들어갔다.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화폭을 뚫고 나온 듯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인왕산 주변을 하릴없이 거닐기도 했다. 그렇게 그냥 시간을 보냈다. 서울에 살 곳을 정하고 일자리를 구한 뒤에도 주말만 되면 나는 무작정 길을 나섰다. 하루는 버스를 타고 최대한 멀리까지 가보고, 하루는 지하철을 타고 아주 낯선 곳까지 가봤다. 무작정 나선 길의 끝에서 고즈넉한  하나를 발견한 날엔, 서울이란 도시가 아주 삭막한 곳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했다.


시절의 내겐 우뚝 선 나무도 가로등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이나 북두칠성 같은 것들쳐다보지 않았다. 방황이 방황 그 자체로만 머물 수 있도록  나는 아주 오랜 시간 걷기만 했던 것 같다. 먼 오지로 떠나거나 국의 거리를 거닐 만큼 거창한 방황은 아니었지 나의 방황이 부끄럽거나 사소하지도 않았다. 그러한 시간의 끝에 나는 더 많이 슬퍼졌고 더 깊이 좌절했으며 그래서 다시 일어설 힘도 생겼기 때문이다.


나의 북두칠성은 뭐였을까? 나는 삶을 애써 위로하려 하거나 어설프게 희망하려 하지 않는 것에서 오히려 힘을 얻었다. 생의 끄트머리 가서야 비로소 생을 갈구하듯이 말이다. 모든 생의 순간에 온전히 투신하는 것. 그것이 절망이든 희망이든 선택 없이 오로지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뚝 선 나무이자 빛나는 별이 되기 위한 첫걸음 아니었을까? 나는 아직도 누군가의 나무나 북두칠성이 되어줄 만큼 단단하지도 환하게 빛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길 위에서 무작정  헤매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나는  하늘의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그 빛을 따라 걸을 수 있을 만큼은  자신 길 찾게 되지 않았을까?


다른 이의 길을  비춰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에 번쯤은 흔들리는 나를 멈추고 누군가에게 북두칠성과 같은 존재가 되어 주기를 소망하기도 .


노래에서, 같이!

출처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Educate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