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집의 '딸은 애도하지 않는다'
사과집(사소한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기)의 '딸은 애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조금은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떠나보내게 된 딸의 애도 기록이 담긴 책이다. 나 역시 비슷하게 아버지를 잃었기에 공감할 만한 부분들이 참으로 많았다. 그리고 이미 부모의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느끼고 생각해 보았을 법한 내용이 담겨 있다. '딸은 애도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은 표면적 의미처럼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극진하고 깊은 애도의 과정이 이성과 감성의 측면에서 골고루 다루어져 있다. 또한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작가가 맞아야 했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아버지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혼란이 복합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그럼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애도란 죽음 이후 얼마간의 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사는 동안 내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애도의 과정은 너무나 깊고 어려워서 단순히 '애도한다'라는 말만으로 담아내기에는 부족했던 게 아닐까 싶다.
유가족에게 애도란 철퍼덕 주저앉아서 엉엉 우는 것에 그치는 감상적인 일이 될 수는 없다. 죽음 이후의 모든 일들은 생각보다 형식적이고 복잡한 절차들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죽음에 애도하기는 쉽다. 하지만 가족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쉽게 애도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떠나보내기까지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다. 장례식이란 형식적 절차를 거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고인의 물건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물건마다에 담긴 추억을 떠올리며 고인의 흔적을 하나하나 비워내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감정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사망신고나 유산 처리 등 해야 할 행정적인 업무들도 뒤따라 온다. 이 책의 작가는 아버지가 직장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산재 신청을 하는 데에 매달려 바쁜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날들 속에서 고인에 대한 추억은 마음속에 가지런히 정리되기는커녕 어수선한 일상 속으로 뒤죽박죽 흩어져 버리고 만다. 그러니 죽음 이후의 과정을 모두 거치고 나서도 우리는 여전히 한 사람을 곁에서 떠나보내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이다. 완전한 이별은 수년이 걸릴 수도 있으며 우리 삶은 애도 속에 한참을 머물러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4년이 넘었지만 진정으로 아버지를 애도하고 떠나보냈는지 알 수가 없다. 작가는 아버지의 죽음을 돌아보며 책 한 권을 집필해 냈으니 참으로 극진하지 아니한가? 그럼에도 자신의 애도가 아직은 미진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글쓰기는 남겨진 내가 여진을 감당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죽음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망각할 수 없는 비밀은 고요히 혼자 간직하고, 망각하기 쉬운 것들을 여기에 기록한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후에 사실은 이 모든 과정이 적절한 애도였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가 오길 바란다.
출처 딸은 애도하지 않는다, 사과집
나 역시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를 애도하며 글을 쓴 적이 있지만, 한 사람의 생을 오롯이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저 내게 남은 아련한 추억 몇 가지와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저 혼자 위로하기 위한 애도 일기일 뿐이었다. 불쌍한 아버지란 사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참으로 외롭지 않았을까 싶다. 외동딸인 나는 오랜 세월 외면했던 아버지를 돌아가시고 나서도 진심으로 애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으로 보면 한없이 초라하고 애처로운 인생일 뿐인데도 말이다.
아버지는 1942년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용으로 희생된 할아버지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할머니는 험난한 격동의 시대 속에서 홀로 사 남매를 키워냈고 그중 아버지는 막내아들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물인지 죽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연명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으며, 어른이 될 때까지도 음식다운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고 어른의 보살핌이나 가르침도 없이 제멋대로 클 수밖에 없었다. 혈기왕성한 청년이 된 아버지는 마음씨 착하고 고운 어머니를 만나 단박에 사랑에 빠졌고, 어머니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구애하였다. 동네방네 흉흉한 소문이 퍼지자 외할아버지는 마지못해 결혼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말과 행동이 거칠고 때론 난폭하기까지 했던 아버지이지만, 실상 아버지는 태어나면서부터 제대로 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라났기에 한없이 나약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속내가 그렇기에 살아남기 위해 더욱더 외면을 강하게 포장하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것을 깨닫는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아버지 없이 자란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몰랐고, 자식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전혀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평생을 아버지가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었는데, 아버지 역시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어렵고 힘겨웠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런 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무심함과 이따금 이유 없이 쏟아내는 폭언이나 거친 폭력, 숨 막히는 간섭이 끔찍하게 싫고 원망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부모가 되고 보니, 아버지가 가진 내적 결핍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주었던 상처들이 말끔히 나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가 왜 그렇게 평생을 날을 세우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조차 상처를 주며 살 수밖에 없었는지는 이제 조금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에 대한 나의 이해는, 그나마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아가신 후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게 아버지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차츰 변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아버지란 내게 절대로 변하지 않을 화석 같은 존재였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나의 애도는 지금부터가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느끼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에는 애통함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장례가 이루어지는 내내 약간은 무덤덤했으며 그 공간에서 약간 떨어져 멀리서 나를 지켜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장례식이란 모름지기 애가 끊어질 것 같은 통곡의 소리가 새어 나와야 할 곳이건만, 나는 죽어도 그런 울음을 울 수가 없었다. 나조차도 나의 무덤덤함에 놀랐고 실제로 지인들은 그런 내게 의아해하거나 놀랐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거짓 슬픔을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허나 나에게 부족했던 것은 아버지의 진실에 대한 이해였던 게 아닐까? 돌아가시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엔 돌아가시고 나서라도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였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 인생을 물들인 어둠과 우울의 절반쯤은 아버지로 인한 것이었기에 그 먹구름을 걷어내고자 하는 나의 안간힘은 결국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이나 마찬가지인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내게 유해한 존재로 여기고 살아온 인생은 고통스러웠다. 아버지를 보내고 반 백 살이 다 되어서야 나는 아버지를 무해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용기와 깨달음을 얻었다. 참으로 오래 걸렸지만 말이다.
나는 아버지를 여전히 잘 모른다. 내겐 아버지의 생을 돌아볼 아무런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내 머릿속에 남은 기억이나 추억 또한 부실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살면서 끊임없이 아버지를 떠올릴 존재는 이 세상에 나밖에는 없을 것이란 걸 안다. 아버지의 잘못과 미덕, 강함과 약함, 아버지가 두려워했던 것들, 싫어했던 것들, 아버지의 사랑과 나의 증오 등에 대하여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의미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변화해 가는 과정을 나는 담담히 지켜볼 것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나에게는 최선이자 최후의 애도이다. 언젠가 아버지에 대한,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럴 때까지도 나의 애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의 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