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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Sep 07. 2023

2023 전주독서대전 시민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읽고 - '최소한의 표현으로 최대한의 사랑을'

이 글은 '2023 전주독서대전 시민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저의 독후감입니다. 제가 읽은 책은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라는 책입니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최대한의 사랑을


나에게는 할머니가 없다. 외할머니는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고 친할머니는 초등학생 때 돌아가셨다. 친할머니에 대한 기억도 흐릿한 한두 장면이 전부이다.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란 도대체 어떤 존재를 의미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내게는 기억조차 없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은 ‘할머니’란 이름 뒤에 숨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식을 키우는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엄마 노릇’의 어려움과 엄마보다 더 엄마 같았던 할머니의 ‘사랑 가득한 육아법’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나의 할머니는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소리 없는 함박웃음으로 내 곁에 남았고, 나는 죽을 때까지 그분을 닮고 싶었다.”


소리 없는 함박웃음이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되는 할머니! 할머니는 말이 별로 없는 분이었다. 해야 할 말만 했고 특히 훈육이 필요한 자리에서는 더욱더 말을 아꼈다. 나는 지금 아홉 살짜리 아들을 키우고 있다. 자기주장이 강한 아들은 뭐든 자기 뜻을 굽히려 하지 않고 내가 하는 말에 또박또박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게 최선은 아니건만 나는 왠지 초장에 아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로 자라지 않을까 싶어 지레 겁을 먹는다. 그러니 강력한 훈육과 폭격기 같은 잔소리를 퍼부어 아들의 행동을 고치려 덤벼든다. 


하지만 나의 훈육과 잔소리는 아이의 행동을 교정하기는커녕 반항심과 거부감만 불러일으켰고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노릇’의 어려움에 좌절했다. 나의 열 마디 말들은 할머니의 한 마디 말보다 부족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통감했다. 나는 그동안 말이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다. 아이를 바로잡기 위한 말인지 나의 감정을 토로하기 위한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들로 아이의 가슴에 생채기만 내곤 했던 것이다.  


 “원, 애두 참 별나.”

 “예쁜 사람, 왜 그러나.”

 “착한 사람이 왜 그러나.”


할머니는 이렇게 싱거운 말 한 마디로 야단을 쳤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최소한의 표시만 하고 마는 할머니의 야단 법은 상대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고 꼬리를 내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왜 나는 많은 말을 해야만 아이가 내 의견에 따를 거라고 생각했을까? 


반대로 칭찬할 일이 있으면 또 어떤가? 호들갑스러운 칭찬은 당장에는 기분이 좋을지언정 아이에게 부담을 주기에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할머니는 “장한 사람이여.” 한마디로 아이의 노고를 가볍게 인정해 주고 말았다. 혼을 낼 때도 칭찬을 할 때도 어찌 보면 시시하고 미적지근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단순하고도 간결한 할머니의 이런 표현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마음의 안정과 균형감을 갖도록 도와주었다. 


‘그려, 안 뒤야, 뒤얐어, 몰러, 워쩌.’ 정겹고 단순한 할머니의 다섯 단어가 마치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살아가는 동안 그 어떤 말보다 작가에게 깊고 큰 힘과 위로가 되어준 말들이었다. “아이는 부모의 빈틈에서 자란다.”는 말이 있다. 첫째도 허술해야 하고 둘째도 허술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안타깝게도 내적 불안이 많은 완벽주의 성향을 지닌 엄마이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너그럽게 봐주어야 한다고 다짐하건만 모래성처럼 한순간에 결심이 허물어질 때가 많다. 나에게 호되게 혼난 아들이 “원래의 착한 엄마로 돌아와 주세요.”라고 말하며 울먹일 때면 어찌나 미안하고 부끄러운지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는 무턱대고 믿어주고 기특하게 여겨주는 누군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는 그동안 만만한 엄마가 되는 것이 왠지 두려웠다. 만만함이 어른에 대한 무시를 낳고 더 나아가 세상까지 함부로 보는 안하무인으로 만들까 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결코 할머니를 무시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만만하고 믿을 만한 할머니라는 토대 위에 자기만의 단단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견고히 쌓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 만만한 엄마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나는 아들을 혼내고 돌아서면 반성하는 허점투성이 엄마이지만 아들을 목숨보다도 사랑한다. 작가가 할머니에게서 받았던 무한한 사랑과 믿음을 나도 아들에게 그대로 전해주고 싶다. 


 ‘엄마노릇’이 힘들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세심함 때문이다. 아들을 사랑하는 만큼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과도할 때가 있는 것이다. 아이는 누구보다 엄마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만의 세상을 인정받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 두 가지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켜 주려면 엄마에게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하다. 아이를 키움에 있어서 할머니가 보여 준 ‘무심함’은 그런 지혜를 제대로 실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관심하지는 않으면서 ‘그랬구나.’ 하는 정도의 작은 반응만을 무심한 듯 보여주는 것이다. 무관심은 상처가 되지만 무심함은 편안함을 낳는다. 상대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애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최소한의 표현으로 상대방에게 최적의 편안함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맵시’가 있는 사랑 표현 방식이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다. 자식에게 많은 일을 해주었다고 생색내서는 안 되며, 자식에게 기대를 하거나 부모의 꿈을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자식이 부모에게 부담감을 느끼거나 책임감을 느끼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 부모는 당연히 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뿐이고, 만약 자식이 잘한 것이 있다면 모두 다 자식에게로 공을 돌려줘야 한다. 그렇게 한없이 너그러운 부모의 사랑과 이해, 관용 속에서 자식은 건강하고 현명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읽고 '아름다운 엄마’가 될 수 있는 중요한 비결을 알게 된 듯하다. 요즘 나는 할머니처럼 말하기를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중이다. ‘장하네, 애썼어, 저런, 어떡해, 그래, 안 돼.’처럼 되도록 간결하게 표현함으로써 나의 생각의 자리보다 아이의 마음의 자리를 더 넓혀 주려고 애쓰고 있다. 아이는 엄마의 이런 변화를 눈치 챘을까? 예전에 비해 아들과 충돌하는 일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은 분명하다. 작가가 선물해 준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 나와 아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되어서 참으로 감사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최소한의 표현으로 최대한의 사랑을 보여주는 비결이었다. 언젠가 나의 아들이 지금의 내 모습을 ‘함박웃음을 짓던 나의 아름다운 엄마’로 추억할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가슴 뿌듯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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