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으면 꼭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는 게 인생이다.
낡고 오래된 주택의 이층에서 암흑 같은 시간을 보낸 후, 우리 가족은 다시 평범한 일상을 회복해 갔다. 우울증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듯이 사라지는 것 또한 느닷없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또다시 주어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갔다. 마침 월세 기한이 끝나는 시점이 되어 작은 빌라를 전세로 얻어 이사도 나갔다. 이층 집에서의 지독했던 악몽과도 영원히 작별하는 듯해서 왠지 마음이 홀가분했다.
작은 소도시로 이사 오면서 덜컥 저질러 버린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전원주택 지을 땅을 산 것이었다. 막연히 나는 우리만의 집을 짓고 싶다는 꿈이 있었고 마침 땅이 나와 있길래 깊은 고민도 없이 사버리고 만 것이었다. 다행히 남편의 증세가 호전되면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집 짓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산 땅은 전원주택 단지 안에 속해 있었고 전원주택조합의 일원이 된 것이었기에 정해진 기간 내에 무조건 집을 지어 입주해야만 했다. 서둘러 건축업자를 선정하고 집 짓기에 돌입했다. 건축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 문외한이었던 우리는 둘 다 직장에 다니느라 현장에 제대로 나가 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공사를 시작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딱 우리 부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설계를 하고 기초를 하는 데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던 공사가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자꾸만 지체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건축업자가 사라져 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공사대금은 이미 거의 다 지불한 뒤였다. 우리는 기다리다 못해 직접 건축업자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놀랍게도 그는 주변의 다른 도시에 가서 버젓이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007 작전이라도 펼치듯 불시에 건축업자가 일하는 곳으로 쳐들어가 그에게 따져 물었다. 아니 실은 빌었다. 갑과 을은 어느새 뒤바뀌어 버려서 우리가 사정을 해서라도 공사를 마무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간신히 건축업자를 불러다 공사를 재개했고 대금도 원하는 대로 다 지불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악덕 건축업자들이 하는 못돼먹은 수법이라고 했다. 공사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에는 건축업자에게 돈을 떼였다며 항의하는 하청업체들이 수시로 내게 연락을 해왔고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애를 먹어야 했다.
그래도 온갖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집을 완성했다. '우여곡절'이란 단어 하나에 모든 걸 담기엔 정말이지 말도 못 하게 많은 시련이 있었다. 만약 가까운 누군가가 집을 짓겠다고 하면 반드시 말려야겠다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림 같이 예쁜 집을 지어 입주까지 하고 나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집안의 구석구석 어느 한 곳도 나만의 선택과 취향이 담기지 않은 곳은 없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집이 탄생한 것이다. 건축업자는 우리 속을 태웠지만 집 하나만은 하자 없이 잘 지어주어서 그걸로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콤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법원에서 온 소장에는 우리가 피고로 되어 있었고 콘크리트 업체가 원고였다. 건축업자 대신 대금 미지급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고소를 한 것이었다. 우리는 모든 대금을 이미 건축업자에게 지급한 상태였고 집을 짓는 동안에도 건축업자의 행태로 숱한 고통을 당해 왔는데 이제 와서 건축업자가 미지급한 돈까지 대신 갚으라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 모든 사달이 난 건 내가 한 사인 하나 때문이었다. 공사 초반에 건축업자가 내일 당장 콘크리트가 들어와야 하니 그것에 대한 확인서가 필요하다며 내게서 사인을 받아간 적이 있었다. 물론 개미처럼 작게 쓰여 있는 글씨까지 세세히 확인하지 않은 건 내 실수였지만 건축업자도 그 서류에 대해 나에게 명확한 설명을 해주진 않았었다. 근데 콘크리트 업체는 그 서류 한 장을 빌미로 내가 보증을 선 거라면서 돈을 갚을 책임이 있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또한 그들만의 세계에서 이루어져 온 오래된 악습이었다.
그로부터 우리는 지루한 소송에 휘말렸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피고가 되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혹스러웠다. 돈을 아끼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셀프 소송을 자처했다. 그것이 또 기나긴 고통을 두 배로 만들었다. 나는 나의 글쓰기 능력을 '답변서와 변론서'를 작성하는 데 바쳐야 했다. 평생 읽어 본 적도 써 본 적도 없는 글을 접하면서 눈물도 흘리고 속도 끓였다. 그리고 첫 채판에서 승소를 했다. 하지만 업체는 불복하고 다시 항소를 했고 우리는 또다시 재판을 시작해야 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우리는 결국 최종 승소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실수로 한 사인 하나로 연대 책임을 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그 사이 법이 개정되고 상황을 역전시킬 만한 판례도 꽤 많이 나온 듯했다. 2년여의 기간 동안 우리는 법원을 들락거렸고 참으로 소모적인 싸움을 해야만 했다. 법원에서 날아오는 종이 쪼가리 한 장에도 잔뜩 긴장하며 불안에 떨며 살았다. 끝이 좋으면 좋은 거라고 승소했으니 그걸로 그만일까? 물론 더는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인 것은 맞지만 두 번 다시 소송에 휘말리고 싶지 않을 만큼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내가 우울증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집 짓는 이야기를 한 이유는 '우울증이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라는 걸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인생이 호락호락해진다거나 세상이 내게 더 관대해진다거나 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일도 어김없이 나와 상관없이 해는 뜨고 질 뿐이다. 비단 우울증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 내가 어떤 고난에 처해 있더라도 내일 그보다 더한 일은 일어날 수 있으며 억울해하거나 원망해 봤자 그것을 견뎌내야 할 당사자만 더 고통스러울 뿐이다. 인생은 그렇게 알 수 없는 혼란과 미궁 속에 던져져 있는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소송은 무척 힘들었지만 실상 내 삶 속에선 그조차도 사소한 이벤트에 불과했다. 밤새도록 답변서를 읽고 쓰면서도 다음날이면 출근해서 아무렇지 않게 일해야 했고 어린 아들을 돌봐야 했으며 우울증 증상으로 힘들어하는 남편을 보살펴야 했다. 그 와중에 엄마는 계속해서 응급실로 실려 가기를 반복했다. 힘든 일이 있다고 해서 무언가에 매몰되어 살기엔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은 게 삶이었다. 하지만 힘겨웠던 날들을 통해 나는 참 많은 것들을 배우고 성숙할 수 있었다. 소송을 하면서 나라는 인간이 사회 속에서 저지를 수 있는 실수와 타인으로부터 받게 될 피해에 대해 뼈저리게 학습했다. 그리고 남편이 아프지 않으면 엄마가 아프고, 엄마가 아프지 않으면 남편이 아픈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제는 웃으면서 '둘이 동시에 아파 누워 있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내가 벌지 않으면 엄마의 병원비며 생활비가 걱정이고 그렇다고 일을 하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는 상황 사이에서 절절매던 내가 돈 없으면 집을 팔아서라도 쓰면 그만이지 하며 대담하게 배짱을 부릴 줄도 알게 되었다.
신이 주신 학습지를 참으로 열심히도 풀어 왔고 지금도 풀고 있다. 백점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한 번 틀린 문제를 다시는 틀리지 않을 만큼은 성장해 온 나를 본다. 불행의 얼굴을 한 무언가는 언제고 우리를 다시 방문할 준비를 하고 있다. 미리부터 벌벌 떨 것도 아니지만 너무 자신만만해할 일도 아님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우울증이 우리에게 이전보다 더 크게 몸집을 키워 다가올 채비를 하고 있는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아, 산 뒤에는 언제나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는 게 인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