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크족을 버리다

나이 마흔에 첫 아이를 낳았다

by 소위 김하진


지금 나는 한 아이의 엄마이다. 우리는 아이를 왜 낳는가?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다들 뭐라고 대답할까?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나만의 뚜렷한 이유나 가치관, 의미나 목적 등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세상사가 모두 비슷할 것이다. 이유를 찾으려 하면 딱히 그 이유를 모르겠는데도 이유 없는 일은 세상에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당연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소위 딩크족이었다. 실제 결혼식을 올린 기준으로 하면 아이를 가진 게 그로부터 3~4년 정도 뒤의 일이지만 동거를 기준으로 하면 8년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리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합의했었다. 만약 둘 중 누군가라도 아이를 원했다면 우리의 동거는 짧아졌을 거고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 삶을 좀 더 빨리 합류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 '아이'는 막연한 존재였고 우리 사이에 존재하기엔 머나먼 미지의 무언가일 뿐이었다. 우리는 왜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했던 것일까?


그는 우울증 병력이 있었고 나 또한 어두운 내면의 소유자였다. 우리가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것은 두 사람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불안 때문이었다. 우리와 비슷한 존재를 세상에 내어놓는다는 부담감, 우리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버거움 등이 우리를 거세게 짓눌렀다. 우리는 둘 다 똑같은 마음으로 아이가 생기는 것을 피하려 했다. 그냥 이 생은 둘이서 살다가 조용히 마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아이를 낳을 만한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른 수많은 부부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무슨 생각으로 아이를 낳은 것인가요? 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 게 당연한 거지.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으면 나이 들어서 사이가 멀어져. 사는 게 별 거 있나 아이 낳아 키우는 게 다지.' 라며 심드렁한 말들을 했다. 심지어는 '아이를 낳지 않으면 나중에 이혼하기 쉬워.' 하는 식의 협박 같은 말로 아이 낳을 것을 독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복적인 간섭과 자극이 서서히 우리 내면에 작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이가 없으면 영원히 평범한 삶으로는 편입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아이 없는 부부의 위태로운 미래가 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나 하나로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소멸해 버리는 것에 대한 허무함까지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이유들에 맞불을 놓을 만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이유들'이 하나씩 마음속에서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결정을 유보하며 살았다. 여전히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어느덧 내 나이는 마흔에 접어들고 있었다. 엄마가 되기엔, 아빠가 되기엔 스스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았던 우리는 우습게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되어가자 마음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남편이 더 그랬다. 내 나이가 세 살이나 많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자기야, 우리 아이 안 낳기로 한 거 변함없는 거지? 만약에 마음이 바뀌어도 이제 나의 생물학적 나이를 고려해야 해. 마흔이 넘으면 이제 아이를 낳고 싶어도 못 낳을 수도 있어. 그리고 실제로 아이가 생긴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야."

"응, 알고 있어. 그래서 조금 고민이 되네. 나이가 드니."

"정말? 진짜로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거야?"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는 속담처럼 작은 의심의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다 보면 견고했던 믿음의 벽에도 커다란 구멍이 뚫리기 마련이다. 우리 마음에 뿌려진 불안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걷잡을 수 없이 커다란 나무가 되어 버렸을 때쯤, 우리는 딩크족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수많은 평범한 부부들 중 하나가 되어보자고 합의했다. 나는 나이 마흔을 코앞에 두고 지금껏 거부해 왔던 아이를 낳기 위해, 하늘의 뜻에 내 육체를 자연스럽게 내맡기기로 마음을 바꿨다. 신기하게도 아이를 낳기로 마음을 먹고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지금의 아들이 생겼다. 긴 세월 동안 거부했던 아이가 마치 우리에게 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황급히 찾아오자 나는 약간의 죄책감마저 들었다. 한낱 인간의 이기심과 두려움 때문에 소중한 생명이 그동안 수없이 내쳐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왠지 겁이 났다.


나는 그가 소년원에 근무하는 동안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가 농촌지도사로의 이직을 성공하면서 함께 작은 소도시로 이사를 했고 하늘도 바람도 공기도 모든 게 낯설기만 한 곳에서 아이와 함께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뒤늦게 찾아온 우리의 소중한 아이에게 관심조차 가질 수 없었다. 우울증이란 덫에 갇혀 안쓰러울 정도로 망가져 버린 그는 아이의 눈을 제대로 바라볼 힘조차 없어 보였다. 나는 핏덩이 같은 아이를 안고 울부짖었다. '당신이 이렇게 무너져 내릴 거였으면 도대체 왜 아이를 낳아 기르자고 한 거야?'라면서 원망에 가득 차 악을 써댔다. 물론 혼자만의 마음속 목소리로 그랬다. 그는 건드리면 영원히 꺼져버릴 것만 같은 희미한 촛불이었다. 반면 아이는 언제나 해맑게 나만을 바라보며 웃는 강렬한 불길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그 어떤 어둠의 싹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악물기로 했다. 억지여도 상관없었다. 아이 앞에서만은 웃었고 아이가 있기에 웃어지는 날들도 더러 있었다.


아이는 왜 우리에게 왔을까? 이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고 당연한 일은 더더욱 없다. 우리는 한낱 이기심으로 아이를 거부했고 또 역시 한낱 이기심으로 아이를 낳기로 한 못난 부모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자식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아이는 우울증에 걸린 그와 그 옆의 흔들리는 나를 햇살보다 환한 빛으로 비추어 주었다. 마치 그러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기라도 한 존재인 것처럼.


그리고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멀리에서 아득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출처 무아, '연필로 그리는 풍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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