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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Nov 19. 2023

'H마트에서 울다' 엄마...

한국 음식에 담긴 엄마 그리고 한국!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


나는 딸이기도 하고 엄마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스로 어떤 딸이고 어떤 엄마인지를 평가받는 일은 최대한 회피하면서 살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해도 최고의 딸, 최상의 엄마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을 돌이켜 보건대, 무언가 억지스러운 노력을 하면 할수록 딸로서 엄마로서의 내 정체성은 더 흔들렸고 심지어 나란 존재 자체가 휘청거리기까지 했었다.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딸, 엄마로 누구와 비교당하지도 않고 누구에게 평가받지도 않으면서 살고 싶다. 그것이 설령 이기적인 일일지라도. 나는 단지 나와 아들, 나와 엄마 사이에서 중심을 잃지 않은 채 기울어지지 않는 평형을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엄마나 아빠에 대한 타인의 이야기들(시, 소설, 에세이 등 모든 류의 글들)을 읽다 보면 어김없이 나의 딸로서의 정체성에 심한 타격을 입곤 했다. 특히 마지막까지 남아서 나를 괴롭히는 감정은 '죄책감'. 착한 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건만 알 수 없는 죄책감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 왜일까?     


그래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읽었다. 'H마트에서 울다'라는 책을. 다행히 이 책은 작정하고 나의 죄책감을 후벼 파지는 않았다. 작가의 담담하고 담백한 서술은 나를 감정의 파도에 지나치게 휩쓸리지 않은 채 이 책을 완독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물론 군데군데 울컥하며 눈시울을 적시긴 했지만 말이다. 작가인 미셸 자우너는 유명한 가수이자 기타리스트로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다. 그녀는 한국 문화를 오로지 어머니가 만들어 준 한국 음식을 통해 접하며 자랐고 한국어를 배웠지만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미셸 자우너가 영어로 쓴 책을 이민자 2세대인 한국계 미국인 정혜윤이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조합은 훌륭했다. 어쩌면 우리가 접하는 'H마트에서 울다'는 미셀 자우너의 책이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작가와 번역자의 완벽한 합작품으로 한국인 독자들을 사로잡을 만한 장점과 매력을 두루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본이지만 아주 매끄럽게 윤문이 되어 있어서 읽기에 전혀 거북하지 않았다. 특히 둘 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국의 식문화에 대해 상세하고 완벽하게 소개하고 있다. 식문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 예를 들어 화투 같은 것까지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나는 아직도 화투를 칠 줄 모른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인인 나보다 아는 게 많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작가가 직접 잣죽을 끓이고 김치를 담그는 장면에선 그녀와 나 중 누가 더 한국적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처럼 상세한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와 서술은 한국을 모르는 외국인들에겐 흥미롭고 재미있는 한국 공부가 될 테고, 나 같은 한국인들에겐 외국인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역으로 들여다보는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책의 주된 내용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돌아가신 엄마를 추억하는 딸의 이야기이다. 엄마와 함께 한국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장을 보러 갔던 H마트에서 엄마를 떠올리며 눈물짓는 딸의 이야기. 음식이야말로 우리 추억을 지배하는 강력한 매개체가 아닐까? 어떤 순간의 기억은 음식의 냄새나 혹은 맛으로 우리 삶을 강력하게 장악하게 된다. 작가는 이미 돌아가신 엄마를 음식 속에서 매일 만나고 있었다. 자기 손으로 엄마가 만들어주던 음식을 직접 만들면서. 작가는 결코 착하고 말 잘 듣는 딸은 아니었다. 말썽도 많이 피웠고 예민하고 까칠하기 짝이 없는 반항아에 가까웠다. 엄마 역시 그런 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너그럽게 이해해 주진 못했다. 자식에 대한 애착과 간섭이 심한 한국 엄마의 전형이었다. 그러니 둘은 지독하게 부딪혔고 갈등했고 반목했다. 하지만 이 책이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뒤늦게라도 엄마의 진심과 사랑을 깨달은 딸이 엄마에게 보내는 애절한 사모곡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부모의 죽음 앞에서 자식은 한없이 작아진다. 악을 쓰고 대들고 덤비던 자식이었더라도 한순간에 순한 양이 되어 바닥에 납작 엎드리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반성과 사랑 고백은 그래서 전혀 낯설지가 않다. 그리고 신파적이지도 않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어머니가 50대의 이른 나이에 암으로 고통받다 세상을 떠나면서 20대의 작가가 느꼈을 상실감과 부채감이 생각보다 컸을 것이란 점이다. 나는 이제 곧 50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이따금 부모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헛헛한 외로움에 가슴이 사무칠 때가 있다. 휴대전화에서 구글은 매일같이 과거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내게 배달해 준다. 그 앨범을 열어볼 때마다 4년 전, 5년 전 과거를 느닷없이 조우하게 되는데 어떨 땐 가볍게 웃어넘기고 말지만 어떨 땐 가슴이 찡하고 아련해 힘들기도 하다. 어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 한 장이 내게 배달되어 왔다. 4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5년 전 모습이.... 아버지의 백발 가득한 뒷모습에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책의 작가는 한국 음식으로 엄마와의 추억을 되새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각자만의 추억 버튼이 따로 있을 것이다. 버튼이 건드려질 때마다 삶은 중단되고 시간은 먼 과거로 되돌아가고 나는 다시 어리고 못난 자식이 되어버리곤 한다. 그때 당시엔 죽었다 깨어나도 몰랐을 지금의 후회와 반성에 눈물짓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나는 온라인에서 배달된 사진 한 장 앞에서 울다가 H마트에서 우는 작가를 떠올리며 연민하다가 언젠가 또 무언가의 앞에서 똑같이 무너지고 말 나를 예감한다. 바보 같을지라도 이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내가 살면서 부모에게 지었을 모든 죄들 앞에서 부끄럽지만 당당하게 고백하건대,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고 곁에 있는 어머니를 나는 많이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는 것이다.      


아주 한국적이면서도 전혀 한국적이지 않은, 모녀의 시린 사랑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권하고 싶은 책이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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