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어릴 때부터 그랬어. 엄마는 이유 없이 자주 슬펐지. 이유를 갖다 붙일 수도 있었지만 그게 진짜 슬픔의 이유는 아니었어. 슬픔의 덩어리가 이만큼 목구멍까지 차 올라와도 울 수는 없었어. 울어버리면 왠지 그 슬픔이 죄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왜 사람들은 슬픔을 그토록 두려워하거나 불편해하는 걸까? 나부터도 누군가 내 옆에서 울어버리면 덜컥 겁 먼저 나더라. 그 사람의 슬픔은 그 사람만의 것인데 왜 내 존재가 송두리째 거부당하는 느낌이 드는 걸까? 나로 인한 슬픔은 아니란 걸 아는데도 도무지 무고해지지 않는 건 왜일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게 '슬픔'의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모르는 척하며 웃고 있지만 도처에 슬픔이 비처럼 내리고 있고 그 비를 맞은 죄의식들이 하염없이 여기저기서 싹을 터뜨리고 있는 거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니는 거야. 그까짓 것 하고 콧방귀를 뀌면서...
여하튼 그래서 나도 어릴 때부터 슬픔을 숨겼어. 한때는 거짓말쟁이가 되기도 했었지. 코미디언처럼 웃고 까불고 농담도 하면서. 깔깔대는 나와 엉엉 우는 나 사이에서 셔터를 올리고 내리듯 수시로 변신하는 나를, 나는 싫어할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나이가 들었어도 엄마는 여전히 '슬픔'을 숨겨. 아마 네가 아는 어른들은 몽땅 그럴지도 몰라. 슬픔이 머릿속에서 터져 눈으로 입으로 코로 주체할 수 없이 흘러넘치는 날이면 이런 노래를 듣는 거야. 누구도 속이고 싶지 않지만 모두를 속여야만 하는 게 인생이니까. 슬픈 노래는 우리를 조금은 덜 사악하게 만들어주는 거 같아.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귀여운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 창밖에는 낙엽 지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핼쑥한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 창밖에는 눈 오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 아직도 창밖에는 바람 불고요. 비 오고요.
나로 인해 태어난
그가 죽었고 그녀는 울었다.
그녀는 떠났고 그는 기다렸다.
그는 시작했고 그녀는 끝냈다.
그녀는 포기했고 그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살았고 그녀는 웃었다.
그녀는 슬펐고 그는 위로했다.
그는 걸었고 그녀는 멈춰 섰다.
소설을 쓸 때마다 지극한 통증을 느낀다. 내가 만들어낸 거짓을 거짓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 소설의 숙명이 버겁다. 왜냐하면 나는 거짓말을 너무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가난한 창작의 소산물이 부끄럽다. 아무도 읽지 않은 미완성의 완성된 소설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혼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덮쳐오는 슬픔을 밀어내고 다시 거짓말을 연습한다. 어린 날처럼 뻔뻔하게 그럴듯하게 태연하게. 그런데 거짓말이 거짓말인 티가 난다. 슬픔을 잘 숨겨 왔다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렇게 거짓말에 서투를 수밖에.
슬픔을 오롯이 슬픔으로 느끼고 싶은 이에게 송창식의 '창밖에는 비 오고요'를 들려주고 싶다. 물론 이게 웬 청승이냐며 손사래를 칠 사람이 한둘이 아니란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빈집같은 노래이건만 왜 모든 게 다 보이고 그려지는지... 어쩌면 나는 이런 소설을 쓰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다 보여주고 울지 않으면서도 슬퍼서 죽을 것 같은 그런 무한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를 들으며 울다가, 나는 또 무릎을 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