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떻게 죽음을 그렇게…… 저급하고 경박한 방식으로 다룰 수가 있어? 정말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끔찍해, 그럴 순 없어….”
“모두가 죽을 수도 죽지 않을 수도 있었어. 당신도 알잖아? 죽음 자체가 가볍다는 게 아니야. 죽음으로 가는 방식이 그다지 진지하지만은 않다는 거지. 엄밀히 말해 우리는 죽음 혹은 아님의 상태에 잠시 머물러만 있는 거라고.”
“삶 혹은 아님이 될 순 없는 거야? 왜 그렇게 비관적이야?”
“글쎄, 이건 낙관이냐 비관이냐의 문제가 아니야. 모든 삶의 끝은 결국 죽음일 뿐이잖아.”
다비드와 여주인공의 대화를 듣다가 세상이 한꺼번에 소등된 듯 캄캄해졌다. 무대 위엔 어느새 아빠와 오빠 그리고 이 대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너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너는 그들을 애써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온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최대한 너 자신만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앞에는 엄청나게 큰 거울이 있었다. 눈만 뜨면 그들이 너를 향해 손을 뻗으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너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죽음으로 가는 방식은 진지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랬다. 아빠는 행방불명되었고 오빠는 자살했고 이 대리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뜬금없거나 경박하거나 허무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사라졌다. 죽음이 아니 삶이 그렇게 가벼울 순 없다고 아무리 소리쳐 봤자 소용없었다. 하지만 죽음으로 가는 길이 쉬웠듯 ‘죽음 아님’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모두가 죽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살 수도 있었다. 바람결에 날아가는 작은 깃털 하나만으로도 죽음과 죽음 아님의 세계는 두 동강 나버릴 수 있는 것이다.
아빠는 떠나기 전에 너에게 무언가를 말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작은 단서를 떨어뜨렸을 수도 있다. 오빠가 죽기 직전에 너는 친구를 만나러 가지 않고 오빠의 방문을 열었을 수도 있다. 무심하게 라면을 먹자고 불러내서 시시껄렁한 농담을 지껄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대리를 오랜 시간 보아온 너는 낯빛이 유난히 시커메지는 그를 보며 이상함을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둥글레차를 함께 마시며 병원에 가 보라고 넌지시 말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진실로 너의 작고 사소한 관심이 절묘하고도 시의적절하게 삶과 죽음 사이의 방향을 반대로 틀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운명의 방향을 돌릴 사람이 반드시 너여야만 했던 것은 아니지만, 분명 네가 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 사실을 알면서도 거부해 왔던 걸지도 모른다. 귀를 틀어막고 있는 네게 신입사원이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괜찮냐고 속삭였다. 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은 끝났고 커튼콜을 받은 배우들이 모두 나와 인사를 했다. 죽음 혹은 아님의 상태를 오갔던 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었다가 한순간에 절망이 되어버리기도 했던 이들이. 아주 사소해서 본인조차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면서 무언가를 저지르거나 당했던 모든 이들이.
신입사원과 함께 다비드에게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이미 다비드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빈틈이 생기자 얼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제야 다비드도 이쪽을 보았는지 인사를 건넸다.
“왔군요? 공연은 어땠어요?”
“예상대로 훌륭했어요. 참, 이쪽은 같은 회사 후배 이재이 씨예요.”
신입사원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다비드의 연기를 극찬했다. 하지만 여태껏 보아왔던 해맑은 얼굴과는 달리 어딘가 모르게 고통이 배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는 다비드에게 짤막한 작별 인사를 건네고는 곧바로 극장을 빠져나왔다. 신입사원은 여전히 연극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듯 눈빛이 아득해져 있었다.
“재이 씨는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요?”
“죽음이요? 전 죽으면 모든 게 다 끝이라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없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고요. 무신론자이자 유물론자거든요.”
“정말이에요? 의외네요. 난 재이 씨가 신을 믿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밝아서요. 터무니없이. 그래서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였나 봐요.”
“신도 믿지 않고 사후세계나 영혼 같은 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제겐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할 뿐이에요.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죽음도 단지 확률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거리 위로 먹이를 물고 가는 개미 한 마리가 누군가의 발에 밟혀 죽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개미의 이동 경로, 주변에 있는 개미의 총 개체 수, 그 길로 다니는 사람들의 수와 평균적인 발의 크기 등 수많은 경우의 수가 겹치고 겹쳐서 일어난 하나의 우연일 뿐이죠. 냉혹한 확률 게임에 희생된 사냥감인 거고요.”
“그럼 재이 씨는 타인의 죽음에 개입한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믿나요?”
“우연과 우연이 계속해서 중첩된다는 건 확률상 불가능에 가깝죠. 하지만 타인의 삶이나 죽음에 전혀 개입할 수 없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그것이 한 사람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어난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모든 게 다 보이지 않는 확률 게임의 일부인 거죠.”
“재이 씨는 생각보다 냉정한 사람이었군요.”
어느새 그는 평소처럼 무해한 얼굴로 생글거리고 있었다. 순간 한류와 난류가 어지럽게 공존하는 듯한 그의 얼굴에서 현기증을 느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다 맞을지도 몰랐다. 모든 건 확률의 문제일 뿐이고 누군가의 의지로 바뀌고 말고 할 문제는 아닐지도. 그의 말대로라면 죄책감 같은 건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너는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너의 얼굴에 오랜 시간 켜켜이 내려앉아 있었던 고통이 왠지 한없이 부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재이에 대한 미심쩍은 의심도 동시에 올라왔다. 그의 냉정함이 티 없는 해맑음의 원천이었다는 게 뭔가 이상했다. 조각이 뒤바뀌어 버린 퍼즐 판처럼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재이는 정말로 괜찮은 걸까?’
※ 이 글의 제목은 세르지 벨벨의 '죽음 혹은 아님'에서 차용했으며 첫 대사도 극에서 가져왔습니다. 나머지 소설의 인물과 내용은 연극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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