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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Dec 20. 2024

남아 있는 자와 떠나는 자, 그리고 남지 못하는 자

 “소식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이요?”

 “이 대리님, 암에 걸리셨대요.”

 “뭐? 암이요?”

 “간암이래요. 이미 상당히 진행된 데다 전이까지 있어서 치료가 어렵다나 봐요.”     


 너는 이 대리와 2년 넘게 같이 근무해 왔다. 하지만 그와 사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업무상 필요한 말을 짤막하게 주고받거나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게 전부였다. 그 역시 너에게 업무 이외의 일로 말을 걸어온 적은 없었다. 그와 너는 가장 오래된 동료였지만 서로에 대해 눈곱만큼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너는 언제까지나 그가 ‘남아 있는 자’ 일 거라고 믿었었다. 너와 함께.     


 과거도 현재도 읽을 수 없는, 그의 묘연한 눈빛에서 너는 알 수 없는 위안을 받았다. 너와 비슷한 사람이 적어도 하나쯤은 주변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따금 스치듯 마주치는 눈동자에서 동질감이나 전우애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고통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단단한 껍데기 안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는 소라게, 그것이 그의 진짜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애써 그 속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고 들여다봐서도 안 된다고 예단하면서.

   

 이 대리가 퇴사하던 날, 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대리님 바쁘세요?”

 “김 대리? 무슨 일 있나요?”

 “아뇨, 차 한잔 같이 할 수 있을까 해서요.”

 “그래요? 그러죠.”     


 탕비실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너는 잠시 그를 자리에 앉혀 두고 둥굴레차 두 잔을 타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차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이 이 대리의 얼굴 위로 연기처럼 솟아올랐다. 그의 안경에 뿌연 김이 서리자 눈동자가 부옇게 흐려졌다. 난방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무실은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내내 겨울이었다. 입을 열자 입김이 먼저 터져 나와 김을 사방으로 흐트러뜨렸다. 순간 너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퇴사하신다고 들었어요. 대리님과 함께 근무한 지 벌써 2년이 넘었더라고요. 그동안 차 한잔도 함께한 적이 없었네요.”

 “김 대리, 혹시 나에 대해 들었어요?”

 “아, 그게 얼마 전에 신입사원이 그러더라고요. 많이 아프시다고.”

 “역시 그랬군요. 그 친구 아주 밝고 싹싹하죠? 우리 같은 사람들이랑은 다르더라고요. 모두에게 순수하게 호의적이에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난다고 해야 할까요? 그게 참 낯선데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더라고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요?”

 “김 대리나 나 같은 사람 말이에요. 2년이 넘도록 이렇게 얼굴 마주하고 이야기 나눌 생각도 못 했잖아요, 우린. 그 친구는 하루면 되는걸. 아프니까 좋은 점도 있네요. 이렇게 다가와 주는 사람들도 생기고.”

 “아, 저는 대리님이 이런 거 불편해하시는 줄로만 알았어요.”

 “김 대리는 지금 나와 대화하는 게 불편한가요?”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진작에 이런 자리를 마련했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늦어버렸어요.”

 “아니에요. 선배인 내가 먼저 다가가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회사 생활이 힘들었을 텐데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해 미안해요. 오늘 이렇게 먼저 인사해 줘서 고맙고요. 그런데 김 대리, 이제부터라도 조금 편안해지는 게 어때요? 난 이제 그럴 기회조차 없어져 버렸지만 김 대리는 아직 늦지 않았잖아요.”


 이 대리가 퇴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졌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사장의 낯빛이 예전보다 어두워졌고 식사 자리에 나타나는 일이 부쩍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특유의 호탕하고 기름진 웃음소리가 더는 회사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너는 지금까지 숱한 직원들이 떠나가는 걸 냉담하게 지켜보았지만, 이 대리의 퇴사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편안해지라는 이 대리의 목소리가 끈질기게 네 뒷덜미를 부여잡으며 뒤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남아 있는 자’였지만 결국, 끝까지 남지는 못했다. 모두가 자기 발로 떠나갈 때도 꿋꿋이 이곳을 지켰던 그가 더는 남아 있을 수가 없어서 떠나버렸다. 문득 너는 혼란스러워졌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너는 ‘남아 있는 자’가 될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이 대리처럼 ‘남지 못하는 자’가 되어 억지로 떠나야 하는 건 아닐까? 오래 벽에 붙여 놓았던 껌을 다시 떼어 씹듯이, 께름칙하고 불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제 너는 회사에서 ‘가장 오래 남아 있는 자’라는 왕관을 머리에 뒤집어쓰게 되었다. 영광과 치욕이 동시에 가슴을 짓눌렀다. 그 무게를 고스란히 견디며 너는 다시 생각했다. 이 대리도 너처럼 이곳에 남아 있는 걸 부끄러워하면서 마지못해 견뎠을까? 어쩌면 이곳에 속해 있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했던 건 아니었을까?


 너는 아주 오랫동안 ‘떠난다’라는 행위에 대해 거부감과 반항심을 가지고 있었다. 떠나는 자들을 비난하고 남아 있는 자의 치욕을 견디는 것만이 너에게 할당된 인생의 배역이라고 생각했다. 너는  배역 너 자신을 철저히 가둬 두고만 있었. 하지만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는 이 대리처럼 ‘남지 못하는 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 아빠와 오빠는 떠난 것일까? 남지 못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너는 한 번도 진실을 알아내려 한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몰라야 네 피가 더 차가워질 수 있었으니까. 얼음처럼 차가워져야 네 심장 단단하게 굳어서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있었으니까.


 너는 신입사원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엔 네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가 응축되어 있었다. 너는 약간 발그레해진 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으레 그렇듯 활짝 웃으며 너의 눈동자를 거침없이 들여다보았다. 순수하게 호의적인 눈이란 이런 것일까? 순간 그의 눈동자가 밤하늘의 시리우스처럼 부셨다.     


 “연극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갈래요?”

 “정말요? 대리님 연극 다시 하세요?”

 “내가 출연하진 않아요. 하지만 보러는 가려고요. 가고 싶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요.”

 “저야 무조건 좋죠. 언제 가나요?”

 “이번 주 토요일에요. 대학로에 있는 소극장이니까 회사 근처에서 만나 함께 가기로 해요.”

 “네, 좋아요. 실은 제가 연극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너는 순수하게 호의적인, 시리우스의 눈을 지닌 그와 다비드의 공연을 보러 가기로 약속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태양의 찬란한 발광을 목격하러.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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