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항성이다.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 다른 말로 별이다. 태양계는 항성인 태양과 그 중력에 이끌려 있는 주변 천체가 이루는 체계를 말한다. 항성을 가운데 두고 여러 행성들이 일정한궤도 안에서 끊임없이 돌고 있는 것이다. 너는 극단에 가면, 태양인 다비드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그의 주변을 돌고 있는 수많은 행성들을 목격하곤했다. 태양과 그들사이의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우주의 질서와도 같았다. 행성들 중에서가장 멀리에 있으면서눈에도띄지 않는 존재가 바로 '너'였다. 이제는 태양계에서 퇴출당해 버린 외딴행성.너는 명왕성이 되어 아득한눈으로 태양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다비드는 주연 배우이자 연출가였다. 그는 세상의 중심이 되기에 마땅한 능력과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과 몸의생김생김이 태양으로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태양의 흑점을 닮은 눈동자와 뜨거운 열기를 토해내는목소리는 무대를 단숨에 장악해 버리고도 남았다. 따뜻한 듯 서늘한, 수수께끼 같은표정은사람들을그의발밑에 무릎꿇게했다. 태양신 아톤처럼 그에게서 뻗어 나오는 빛들이 여러 갈래의 손으로 나뉘어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의 심장을 쓰다듬고 뜨겁게 덥혔다. 하지만 명왕성인 너에게오는 온기는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전화를 처음 받은 건, 산더미같이 밀려드는 업무에 치여 한동안 극단에 나가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너는 한참을 휴대전화에 찍힌 이름을 멍하니쳐다보기만했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벨소리가 끊기기 직전에 전화를 받았다.
"누나, 왜 이렇게 안 나와요? 다들 걱정해요."
"누나..라고....?나를걱정... 해? 왜?"
너는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버벅거렸다. 전화를한게 다비드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우주의 질서가 하루아침에 재편되었을 리는 없을 텐데.' 너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음 날 바로 극단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모두가 자기 일에 바빠인사를건네는 사람조차 없었다. 다비드 역시 주연배우들과 연기 연습을하느라너에게는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날, 극단을 나서려 할 때 동호회 총무가 머뭇거리며 너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두 달째 회비가 밀려 있어서요.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예산이 많이 부족하네요. 좀 부탁할게요."
너는 그 자리에 선 채로 곧장 회비를 입금해 주었다.
그날 저녁 먹다 만 샌드위치를 싱크대에 던져버리고 방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지구과학 시간에 배운 태양계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태양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동그란 궤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에 이르렀을 때 이미 천장엔 궤도를 그릴 공간이 빠듯해졌다. 해왕성에 가서는 궤도가 천장을 뚫고 건물 밖으로까지 뻗어나갔다. 명왕성의 궤도는애초에 이작은원룸 천장 안에 담을수조차없을 만큼 멀리있는 거였다. 어릴 땐명왕성도 태양계라고 배웠는데... 순간 너는 수치스러운건지 슬픈 건지 헷갈렸다.
태양의 중력과 행성들의 원심력이 서로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힘의 균형이 깨진다면 태양계는 공멸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명왕성이 어느 날 갑자기 궤도를 옮겨가는 일 따위는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차라리 태양의 손아귀에서 완전히벗어나 다른 은하로 날아가는쪽이현명할지도몰랐다.밤새뒤척이기만 하던 너는, 박명이 밝아오는 즈음에야 결단을 내릴수 있었다. 탱탱하게 당겨져 있던 태양과의 줄을 스스로끊어버리기로. 아무런 빛도온기도허락되지 않는 태양계에서더 멀리 탈출해버리기로.쫓겨나기 전에 스스로 나가버리기로.
그들은 대부분 백수였고 가난했다. 특히 주연배우들은 상태가 더 심각했다. 공연을 올리기 위해선 몇 달이고 연습에 매진해야 했기에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가 없었다. 공연과 공연 사이 잠깐의 공백기에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생계를 잇는 게 전부였다.무대에선 눈부신 주인공이던 그들이무대 밖에선초라하기 짝이 없는엑스트라였다.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너는엄청난충격을받았었다. 다비드에게서 뿜어져 나오던빛과 열이피식하고사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주연배우들 중 동호회 회비를 제대로 낼 수 있는 사람은없었다. 동호회 살림을 책임지는 건 연극에 두 발을 다 담그지 않아도 되는 엑스트라나 보조스텝들이 대부분이었다.그들은너처럼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정규직 사원들이었다.아이러니하게도 극단에서 가장 열외에 있는 자들이 극단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였다.그들은 고귀한 태양의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자신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기꺼이 불쏘시개로 바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너도 그들 중 하나였다.
다비드가 그날 전화만 하지 않았더라도 너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지켜주고 싶었으니까. 그들이 만들어낸 우주의질서 속에너 또한 순순히편입되고싶었으니까.텅 빈 너에겐 숭배할 무언가가 필요했을지도 몰랐다.하지만 그가너를누나라고 부르는 순간, 너의 가슴은한순간에얼어붙고말았다. 아무런빛도 온기도 느껴지질 않았다. 차갑게 식어버린태양을 위해더는아무것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대보름달집처럼 활활 불타올랐다. 다비드는 언제까지나 태양의 자리에 있어야 했다. 산산조각 나버린 태양의 작은파편들이 너의 심장을 차갑게 파고들었다.
극단에서 오는 전화를 한동안 받지 않았다. 어차피너는 한두 달이면 흔적도 없이 잊힐존재라고 생각해서였다.그런데 다비드에게서 문자 하나가 왔다.
"누나, 많이 바쁜가 봐요.공연에 참여는 못하더라도 꼭 보러는 와요.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문득너는 그동안 네가 해온가짜연극의 완벽한 피날레를위해선그들의 진짜 연극을 보러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자연극을 보고 싶다고 했던 신입사원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