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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Nov 22. 2024

엑스트라

너는 그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는 순간, 그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너는 실상 극단에 가도 가지 않아도 별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정기 공연이 가까워오고 있었지만, 주인공에게 시한부 선고를 하는 의사 따위는 행인 3이나 간호사 2가 대신해도 그만이었다. 결정적으로 너는 그 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같은 그의 얼굴에 대고 '3개월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싫었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발밑까지 주저앉았고 너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숨기기가 힘들다. 다행히 아무도 엑스트라 연기를 눈여겨보진 않았다. 가끔 예리한 누군가가 뒤에서 조용히 혼잣말하듯 물어볼 뿐이었다.

 "어디 아픈가?"


 엑스트라에게 혼신을 다한 연기란 필요 없는 법이다. 엑스트라는 얼마든지 다른 엑스트라가 대신할 수 다. 공연을 목전에 두고서도 한 사람쯤은 죽였다 살렸다 해도 괜찮았다. 거리를 걷다 스쳐가는 사람은 한 명일 수도 여러 명일 수도 아예 없을 수도 있는 거니까. 시한부를 선고할 의사가 없다면 주연배우의 독백으로 대본을 수정해 버리 거였다. 걸리적거리는 존재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너는 엑스트라 겸 스텝이었다. 스텝 겸 엑스트라라 해도 무방했다. 어차피 주로 허드렛일만 했으니까. 극단에서 너는 대체되기도 사라지기도 쉬운, 그야말로 있으나마나 한 존재일 뿐이었다.


 너는 늘 야근을 했다.  사장은 '적당히'와 '당연히'를 눈곱만큼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일찍 퇴근하는 사람들이 보이면 어김없이 모두의 업무량을 잔뜩 늘려버렸다. 반대로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남아 있으면 다음날 뜬금없는 간식을 돌리기도 했다. 사장의 변덕에 직원들은 수시로 롤러코스터를 탔고 퇴근시간만 되면 세모눈을 뜨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너는 그게 싫어서 옆도 뒤도 보지 않고 무조건 벽만 보며 일했다. 사장이 느리적거리다 퇴근을 하고 피로를 견디다 못한 직원들이 하나둘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나, 너는 어둠 머리카락 뭉치처럼 굴러다니는 공간을 가만히 응시하곤 했다. 그러다 시야가 검푸른 심해 속으로 완전히 잠겨버리 허물을 벗듯 천천히 사무실을 빠져나와 네가 사는 원룸으로 돌아갔다. 다시 출근하기까 겨우 몇 시간만을 남겨두고서.


 사무실 바로 옆엔 작은 백반집이 하나 있었다. 너는 거기에서 365일 내내 점심과 저녁을 먹었다. 다른 곳에서 다른 음식을 먹으면 식비는 지원되지 않았다.  사장은 하루도 쉬지 말고 일하라는 압박을,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밥을 주겠다는 호의로 둔갑시켰다. 식당 장부엔 꼬박꼬박 이름이 적혔다. 그 장부는 밥값을 정산할 용도였지만 실은 야근을 기록하는 제2의 출근부였다. 사장은 두툼한 엉덩이로 직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게걸스럽게 밥 한 그릇을 먹어치우곤 했다. 그럴 때마다 너는 입맛을 잃고 숟가락을 일찌감치 내려놓았다. 배를 채우고 나면 사장은 매번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다들 애쓰는 거 압니다만 조금만 더 분발합시다. 이번 분기 실적이 아주 좋아요.  여러분들이 고생한 덕분입니다. 내년에야말로 성과급을 지급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하지만 사장은 단 한 번도 성과급을 주지 않았다. 성과급 시즌만 되면 회사는  느닷없는 위기에 봉착하곤 했으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사장의 말일 뿐이었다. 회계를 보는 이대리는 늘 과묵하고 얼굴이 그을린 성냥처럼 새까맸다. 일 년에 세 번 불이라도 붙은 듯 벌게져서는 열기 섞인 한숨을 토해내 다닐 때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성과급 시즌과 설, 추석 명절 때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붙이거나 물어보진 못했다. 그는 사장의 친동생이었다.


너는 회사를 사랑하지 않았다. 일을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 하는 일이 뭔지도 정확히 몰랐다. 솔직히는 관심도 없었다. 여러 군데의 회사에 지원했지만 단 한 곳에서만 면접을 보라는 연락이 왔다. 면접 날, 사장은 몇 마디 묻지도 않고 앞으로 잘해 보자며 악수를 했다.  뜨겁고 질퍽거리는 군고구마 같은 손에 붙들려, 너는 너의 인상이 아주 믿음직스럽거나 자기소개서가 무척이나 감동을  모양이라고 속으로 우쭐해했다.  바로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너처럼 입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한두 달 근무하다가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럼 사장은 금세 새로운 사람으로 빈자리를 채웠다. '남아 있는 자'속했. 원인 모를 수치심안개 너를 감으며 주변에 경계를 만들고 서서히 벽을 세우 시작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공간에 갇혀 너는 자주 숨이 막혔기침이 나왔지만 참을 만하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다.


 너는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주문을 확인하고 발주서를 넣고 거래처에 연락을 하고 또다시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납품 처리를 했다. 모든 건 컴퓨터 한 대와 전화 한 대만 있으면 해결되었다. 영어와 기호로 된 낯선 이름의 물건들이 밤새 만들어지고 다음날이면 여기저기로 팔려나갔다. 너는 그게 어떻게 해서 돈이 되는 알지 못했다. 다만 하루종일 한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유형의 물질을 만들어무형의 노동에  악착같이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 단지 시간을, 아니 목을 돈으로 바꾸고 있 아니라. 오늘 당장 죽어 없어져도 그만인 엑스트라 아닐 거라고. 너는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고. 아니 살고 있는 거라고. 그래서  회사를 그만둘 순 없었다. 스스로 너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일은 이제 정말 지긋지긋했으니까.


 너는 밀려 있는 일들을 눈꺼풀로 덮고 잠이 들었다. 단지 대여섯 시간의 망각을 위해. 그리고는 다시 일어나 사무실로 향했다. 어둠과 빛을 잇는 버스를 타고 너에게 허락된 자유는 잠시도 없을 거라는 절망에 꾸벅이며 졸았. 그때 그에게서 또다시 전화가 걸려다. 다비드의 부서질 듯 아슬아슬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자꾸만 너를 붙들고 다그쳐댔다. 

 '살고 싶다며. 엑스트라는 지겹다며.'


출처  무아

#연극배우

#엑스트라

#일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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