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비 거부증이여, 이제는 안녕!
나는 옷을 사지 않는다. 사실은 옷뿐만 아니라 내게 소비되는 거의 모든 물건들을 안 사거나 덜 사는 편이다. 액세서리도 하지 않고 향수 같은 것도 뿌리지 않는다. 화장품도 최소한의 것만 바르며 들어온 샘플이 많을 때는 그것을 소진할 때까지 정품 화장품을 사지 않기도 한다. 나는 여자이지만 미용실에도 가지 않는다. 파마를 끊은 지 십여 년이 흘렀으며 염색도 염색약을 사서 집에서 한다. 그렇다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한 여배우처럼 지독한 짠돌이로 재테크에 성공한 사람도 아니다. 나의 소비 거부증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아들의 장난감은 십 여만원이 호가해도 원한다면 사주고 남편이 자동차를 필요로 할 땐 수 천만 원이라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결제한다.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지만 아들이 좋아하는 만화책은 신간이 나올 때마다 척척 사준다. 내 것을 아껴 엄마에게 드리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지인들에게 종종 선물을 보내는 것도 좋아한다. 가족들과 숙소를 잡아 여행을 떠나는 것도 즐긴다. 대부분의 소비를 자연스럽게 하지만 유독 나 자신을 위한 물건을 사는 것에만 지독하게 인색할 뿐이다.
오프라인 매장은 가격이 비싸기도 하고 고르는 게 귀찮기도 해서 수년간 쇼핑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눈으로 보는 아이쇼핑도 이 옷, 저 옷 입어보는 패션쇼도 끔찍하게 싫어한다. 정말로 옷이 필요하면 인터넷에서 특가로 파는 것들을 몇 벌 사 입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옷장은 날이 갈수록 단출해지고 낡은 옷들만 남아 있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한때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책들을 열심히 찾아 읽었고 지금도 마음속으로 지향하고 있다. 입지 않는 옷들은 과감히 버리고 적정한 옷장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다. 문제는 새로 사는 옷이 너무 없다 보니 미니멀 라이프가 아니라 제로 라이프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옷이나 가방, 신발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 보기에 단정하고 해지거나 닳지 않았으며 스스로 착용하기 편안하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 지독한 실용주의와 검약정신이 진짜 정상인 걸까? 진짜 내 진심인 걸까? 하는 의구심이 종종 머리를 어지럽히곤 했다.
어제 인근 도시를 지나다가 90% 파격 행사라는 플래카드가 펄럭이는 걸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보통 세일을 한다고 해서 들어가 보면 한두 벌만 미끼 상품처럼 싸게 팔고 나머지는 원래 가격인 경우가 많았다. 아니면 싸게 파는 옷들은 입기 곤란할 정도로 상태가 별로인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주 멀쩡하고 예쁜 옷들을 정말로 90% 세일해서 판매하는 게 아닌가. 품질도 디자인도 아주 양호한 옷들이었다. 10벌을 담아도 한 벌 가격, 입어보니 내게 찰떡같이 어울리기까지 했다. 아주 오랜만에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옷을 여러 벌 질렀다. 내겐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지름신을 어제만은 기꺼이 맞아들여 칼춤을 추듯 소비를 감행했다. 이 옷들은 내 옷장에서 아주 오랫동안 나의 봄, 여름을 책임져 줄 것이다.
나는 왜 이토록 소비를 거부하게 되었나? 쇼핑을 마치고 나니 그 의문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돈을 아끼기 위해서 매사에 절약하는 것은 맞다. 나의 남다른 절약과 검소가 우리 집 통장 잔고를 불리는 데 한몫한 것도 틀림없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소비 거부증은 자신에 대한 고문이나 형별 같은 자기 통제에 가깝다. 만약 로또에 당첨되어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을 가지게 된다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소비를 늘릴 것인가? 사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도대체 나는 왜 그럴까? 살면서 그것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랫동안 거부해 온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상 그 어떠한 것도 글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소비 거부증을 스스로 분석해 보고자 이 글을 쓴다.
아버지는 지독한 짠돌이었고, 어머니는 씀씀이가 헤픈 사람이었다. 살아생전 아버지는 집안의 등도 켜지 않았고 외식도 여행도 하지 않았다. 본인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돈을 쓰려하지 않았다. 그게 꼭 필요한 지출이어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성화에 시달리면서도 돈 개념이 부족했다. 아버지는 돈이 생기면 모으는 것에, 어머니는 돈이 생기면 쓰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사는 것으로 보였다. 한쪽은 안 쓰려 악을 쓰고, 한쪽은 쓰려고 악을 쓰다 보니 둘은 늘 돈 문제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끝도 없는 한숨과 한탄을 먹고 자랐기에 아버지의 절약 정신에 대한 거부감이 아주 컸다. 어른이 되어 돈을 벌게 되자 나는 번 돈을 어머니가 맘 편히 쓰게 했다. 월급을 받으면 어머니를 백화점에 모시고 가 옷을 사드렸고 집안에 김치 냉장고를 사 들이고 커다란 스피커가 딸린 오디오를 사다 놓았다. 내 것은 하나도 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때는 솔직히 내게 소비 거부증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만약 모든 경제권을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 집은 아주 곤궁하고 힘들어졌을 거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버지는 지독한 자린고비로 살면서 통장에 돈을 악착같이 모았고 통장을 함부로 깨서 사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시고 경제권이 어머니에게 돌아가자 우리 집 통장 잔고는 0원에 가까워졌다. 어머니는 있는 돈은 당연히 다 쓰고 없으면 빌려서라도 쓰고 내가 안 쓰고 어렵게 모아서 드리는 돈도 금세 다 써버리는 분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홀로 밤낮없이 일하고 편의점 빵이나 김밥으로 저녁을 때우며 이율 높은 예금에 월급의 거의 전부를 넣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모은 목돈은 너무나 허망하게 어머니의 빚 청산에 한꺼번에 들어가 버렸다.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 큰돈을 어디에다 왜 빚졌는지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나이가 들어서야 어머니의 씀씀이를 비로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 나는 왜 모든 걸 긍정적으로만 생각했을까. 무턱대고 어머니 편에서 아버지만 비난했으니 살아 계신 동안 아버지는 참으로 외로웠을 것이다. 나는 돈이 없으면 소비하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건 당연한 거지 검소한 것이 아니다. 내가 100만 원을 번다면 그 돈에 맞추어 먹고 입고 써야 한다. 소비를 위해 돈을 빌리고 그 돈을 다른 사람이 갚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경제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나보다 씀씀이가 늘 컸다. 화장대엔 화장품들이 즐비하게 줄을 서 있고 계절이 바뀌면 옷걸이에 못 보던 옷들이 새롭게 걸려 있곤 했다. 나는 이 모든 게 슬슬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싫어하면서 닮는 건가? 나는 어머니보단 아버지랑 비슷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절약을 강요당하는 것의 고통을 알기에 가족들에게는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통제의 칼날은 고스란히 나 자신에게로 향해 한 치의 틈도 없이 아슬아슬하게 내 목을 겨누었다.
내가 벌었든 가족이 벌었든 피땀 흘려 열심히 번 돈을 소중하게 아낄 줄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알아야 한다. 돈이 있는 것의 기쁨보다 돈이 없는 것의 비극을 직시할 줄 알아야만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가슴에 깊이 새겨놓았다. 다만 나는 나 자신이 소비하는 것의 즐거움도 조금은 느낄 수 있길 바란다. 아마도 나는 무의식 중에 아버지의 검소와 절약이 몸에 각인되어 버렸을 것이다. 거기에 어머니의 잘못된 소비 습관으로 인해 고통 겪으며 살다 보니, 소비에 대한 거부감과 반감이 더욱 커졌고 나의 절약과 절제는 세월이 흐를수록 극도로 강화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아무것도 안 사면서 한 푼 두 푼 모아 목돈을 만들면 어머니의 병원비로 들어가는 게 현실이다. 어머니는 생기는 돈은 오로지 본인을 위해서만 다 쓰기 때문에 비상시에 대비하여 돈을 모아두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단 한 번도 입원비를 스스로 지불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돈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스스로 소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쩔 땐 그런 어머니의 당당함이 진심으로 부럽기도 하다. 흔히 하는 말로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고 하지 않던가.
억울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바꿀 생각도 없다. 자식이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다만 현실이 그러하기에 나는 더 절약하고 아끼며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덜 쓰고 모은 돈으로 좀 더 가치 있는 일에 돈을 쓴다면 그것으로 좋지 아니한가. 다행히 나는 옷도 화장품도 가방도 신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닌가. 다만 그것이 스스로에게 지나친 형벌 수준으로까지 치닫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내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야만 그 누구에 대한 사랑과 배려도 의미 있는 일일 테니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를 통해 깨달은 것은 돈은 정말 잘 벌고 잘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문제점은 다 있다. 아버지는 쓸 줄 모른다는 것, 어머니는 안 쓰는 법을 모른다는 것! 현재로서 나는 아버지와 유사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중간 정도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안 쓰든 쓰든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소비를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질 수 있는 자유롭고 성숙한 사람 말이다. 그것은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와는 무관한 것이다. 절약은 이만 하면 세계 챔피언 수준이고 소비는 아직도 걸음마 단계이니 앞으론 내면의 '소비 아이'를 좀 더 키워봐야겠다.
나의 소비 거부증이여, 이제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