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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May 19. 2023

밥, 지긋지긋하고도 아름다운 생의 숙제

엄마, 밥 먹자

양파 껍질을 깐 후 동강동강 자른다. 감자 껍질을 채칼로 깎고 툭툭 자른다. 호박을, 버섯을, 두부를, 파를 한 입에 먹기 좋게 탁탁 자른다. 육수를 낸 물에 준비한 야채를 넣고 된장을 풀어 보글보글 끓인다. 약간의 칼칼함을 더하기 위해 청양고추도 한 개 톡톡 잘라 넣는다. 남편이 좋아하는 맑고 고소한 된장국이다. 집 안 가득 된장국 냄새가 배어들 때쯤 칙칙칙 치익 밥솥에서는 밥이 되는 소리가 명랑하게 울려 퍼진다. 김치를 썰고 계란을 입힌 소시지를 부치고 김을 자르고 소박하지만 정갈한,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밥상을 차린다. 밥, 어제도 먹었고 오늘도 먹고 내일도 먹게 될 밥을 매번 새로운 맘으로 차리고 또 차리는 나는 아내이자 엄마이자 딸이다.


출처  Pixabay



지난 한 달여 동안 엄마는 일이 주 간격으로 응급실에 들어갔다. 심장 시술로 인한 부작용 때문인지 급격히 나빠진 신장 탓인지 뚜렷한 원인도 알 수 없이 엄마는 극심한 복통과 가슴 통증에 시달렸다. 하지만 응급실에 달려가 온갖 검사를 다 받아봐도 당장의 위급한 요인은 발견되지 않았다. 시술을 한 심장은 느리긴 하지만 부정맥 없이 잘 뛰고 있었고 피검사 결과도 당장 투석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계속해서 고통을 호소했기에 어찌할 도리 없이 응급실을 들락거리며 병원에 하소연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주일 전 또다시 엄마가 응급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떨었다. 엄마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공포가 되어 엄습했다. 엄마의 병원행은 충격적일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아니기에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곤 하던 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날만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엄마의 죽음을 생각하면 죄책감부터 앞선다. 누구 못지않게 부모님을 위해 많은 것들을 해왔다고 자신하는 나이건만 엄마의 죽음을 생각하면 내가 해온 것보다 내가 품어온 마음의 죄가 거대한 산이 되어 나를 집어삼킨다. 엄마를 엄마로서 인정하지 못했던 마음, 내 삶을 고단하게만 하는 엄마를 원망했던 마음, 나약하고 의존적인 엄마를 지겨워하던 마음.. 그 숱한 나의 마음들이 굵은 동아줄이 되어 내 목을 조르고 숨을 막는다. 응급실에 누워 있는 엄마는 한 줌밖에 안 되는 작은 몸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무서웠다. 그러나 병원의 검사 결과는 또다시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쫓겨난 우리는 막막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랑 같이 우리 집으로 갈래?"

"그.. 럴.. 까?"

엄마는 주저주저하면서도 내 권유를 뿌리치지 않았다. 평소 엄마는 내가 사는 집에 오지를 않았다. 대학 시절, 쓸쓸한 자취방에서 홀로 지내던 나날들에도 엄마는 단 한 번도 내가 사는 방에 와본 적이 없었다. 아마 어디에서 사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결혼을 하기 전 자취할 때도 결혼을 하고 살림을 꾸렸을 때도 엄마는 이사 후 의례적으로 한 번 구경하러 오는 것 말고는 일체 와 보지를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그저 극도의 무관심이 내겐 약간의 상처로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 집도 짓고 나서 한 번 와보고는 별로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산밑에 박혀 있어서 답답하다면서 못마땅해했다.


게다가 나는 늘 직장을 다녔기에 엄마가 오면 하루종일 집에 갇혀 가족들을 기다리며 감옥살이해야 할 것이 분명했기에 오기를 권하지도 않았고 엄마 자신도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휴직 중이라 엄마를 혼자 두지 않아도 같아 용기 내어 말을 꺼냈던 것이다. 집에 온 엄마와 나의 최대 목표는 '밥'이었다. 무엇이든 먹이려는 나와 무엇이든 먹어보려는 엄마의 합심으로 눈만 뜨면 '무얼 해 먹을까? 무얼 사 먹을까?'를 함께 고민했다. 넘게 곡기를 제대로 이어본 적이 없었다는 엄마는 우리 집에 오더니 하루 세끼를 숟가락 씩이라도 뜨기 시작했다. 나는 없는 솜씨에 뭐든 만들어 댔고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놀라워했다. 엄마는 평생 내게 돈을 벌어오게 시킬지언정 집안 살림을 시킨 적은 일절 없었다. 집에 살 때는 밥솥에 밥을 안치는 것도 해본 적이 없던 나였다. 결혼 후에도 친정에 가면 부엌살림이 것이 아닌지라 주도적으로 음식을 없어 늘 엄마를 거들기만 했었다. 내가 이렇게 혼자서 뚝딱뚝딱 뭐라도 만들어 내오는 것을 엄마는 감격스러워했다.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내가 딸이 해주는 밥을 다 먹어보다니."

"엄마 별로 먹지도 않던데 뭐."

"아냐, 이게 내가 최고로 많이 먹는 거야."

"그래, 한 숟가락이라도 입에 맞는 게 있음 먹어. 그럼 돼. 엄마는 먹고 싶은 것만 생각해. 뭐든 다 해줄게."


엄마는 집에 온 지 며칠이 지나자 제법 걸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전엔 숨이 차다며 코앞까지 걸어가는 것도 힘들어했었는데 말이다. 조금 걸을 수 있게 되자 일부러 밖에 나가 잠깐씩 산책도 했다. 엄마와 단 둘이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남편도 주말엔 아이를 데리고 나가주어서 엄마와 나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을 하고 밥을 해 먹었다. 눈에 띄게 컨디션이 좋아진 엄마를 병원 진료에 맞추어 일주일 만에 집에 모셔다 드렸다. 물론 여전히 각종 통증에 시달리고 밤잠을 설치지만 엄마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딸의 사랑을 먹은 탓인지 이전보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나의 보잘것없고 시시한 밥이 엄마에게는 병원 약보다 나은 효과를 셈이다. 밥은 그렇게나 위대한 것이다.


남편이 아플 때도 그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남편이 방문을 열고 나올 때 먹을 수 있는 따뜻한 밥을 차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의 아픔을 대신해 줄 수 없었으며 말로 하는 위로도 한계가 있었으며 지나친 걱정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저 나는 조용히 밥을 했고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 밥을 차려 주었다. 그 역시 그런 힘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진실로 밥은 그렇게나 위대한 것이다. 


밥심으로 산다고 하지 않던가. 어르신들은 곡기를 끊으면 얼마 살지 못한다고도 한다. 흔하디 흔한 밥이, 어제도 먹었고 오늘도 먹고 내일도 먹게 될 밥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고 값지고 소중한 것이다. 엄마는 내가 한 밥을 먹으면서 딸의 사랑을 먹었고 인생의 보람을 먹었고 여생의 희망을 먹었다.

"밥은 먹었어? 잠잤어?"

언제나 나의 전화는 이 두 가지 질문으로 시작한다. 때로는 딱 이 두 가지 문제만 남아 버린 생이 남루하고 초라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늙고 죽어간다는 것은 다른 모든 중차대한 문제들을 뒤로 젖혀두고 '먹고 자고 싸는' 원초적인 생의 문제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느껴져서이다. 하지만 평범한 나의 삶이 언제 그리 세상의 중차대한 문제와 연관이 있었던가? 스스로를 초라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허세와 가식일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엄마의 먹고 자고 싸는 문제는 온 우주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가 맞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아들이 태어났을 때 오로지 먹고 자고 싸는 문제로 씨름하던 때를 떠올려본다. 아들이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만으로 나는 내 삶이, 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그 이상의 것들은 다 사치일 뿐이지 않았던가. 엄마의 밥, 자식의 밥, 남편의 밥. 이 중차대한 문제 앞에서 나는 뜬구름 잡는 헛소리는 그만 집어치우고 저녁밥을 하련다.


밥, 이 지긋지긋하고도 아름다운 생의 숙제.

이 숙제를 할 수 있음에 이토록 감사하다.

엄마를 살릴 수 있어서 남편을 살릴 수 있어서 아이를 살릴 수 있어서.

엄마, 밥 먹자. 어제도 먹고 오늘도 먹고 내일도 먹자.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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