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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슈피리어에서

191년의 교실

by Elizabeth Kim

고속도로에 진입하던 아침, 라디오에서는 비 예보를 끝없이 반복했고, 내비게이션은 토론토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칠색의 선으로 길게 그려 보였다. 슈피리어 호수(Lake Superior)라고 적힌 표지판이 멀리서부터 커졌다가 내 앞을 스쳐 갔다. 캐나다 온타리오에 살면서도, 그동안 거리는 늘 핑계였다. 호수는 너무 컸고, 지도 위에서조차 한 화면에 담기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에서 보낸 2년이 내 마음의 방향을 바꿨다. 돌아와 보니 미루는 습관이 가장 멀고 높은 산이었다. 그래서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비슷한 길 위를 반복해서 달렸지만, 매번 다른 마음으로 도착했다. 힐링의 시간, 사색의 시간, 동행과 소통의 시간, 그리고 꿈을 꿰매는 시간. 이름만 달라진 게 아니라, 내 삶의 속도 또한 조금씩 조정되고 있었다.


슈피리어호는 ‘최고의 호수’라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시작된 이름이라지만, 실제로는 단어보다 훨씬 크다. 동서로 563킬로미터, 남북으로 258킬로미터. 바람이 세게 불면 파도가 밀려와 해안의 자갈을 굴려댔다. 호수라기보다 바다 같다는 흔한 표현을, 나는 이곳에서야 진짜로 이해했다. 물이 모두 흘러나가려면 191년이 걸린다는 설명문을 읽고, 그 숫자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굴려봤다. 오래 걸리는 일에 대한 인내를 배워야 한다면, 아마 이 호수가 제일 좋은 교실일 것이다.


첫 여정은 수세인트마리(Sault Ste. Marie)에서 시작했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캐나다와 미국이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 도시, 이름부터 헷갈리는 도시다. 다리 위를 천천히 지나며 두 나라의 셈법이 맞물리는 장면을 본다. 운하와 급류 덕에 도시의 속도는 늘 빠르고, 오래된 모피 무역의 기억과 아나이시나베(Anishinaabe) 사람들의 이야기가 표지판과 전시장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관광지의 말끔한 문장들 사이로, ‘여기가 원래 누구의 자리였는가’를 떠올리고 있다. 그 생각을 품고 나면 풍경을 보는 자세가 달라진다. 셔터를 누르는 손이 조금 조심스러워지고, 발뒤꿈치가 땅을 덜 어지럽히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호수와 나란히 달리다 보면, 도로 옆으로 치페와 폭포(Chippewa Falls)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물기 묻은 바람, 젖은 이끼, 바위 위로 흘러내리는 흰 물줄기. 그룹 오브 세븐(Group of Seven)이 이 근방에서 이 풍경을 붙잡으려 했다는 말이 갑자기 현실이 되는 곳이다. 예고 없이 내리던 소나기 때문에 급하게 멈춰 섰던 그날, 웅성거리는 물소리를 더 가까이 듣겠다고 다가섰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 떨리는 다리를 다독이며 웃었고, 그 웃음마저 물소리에 금세 묻혔다. 위험을 지나서야 비로소 경외가 찾아오는 순간이 있었다. 자연을 두려워하게 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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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는 코리안 캐네디언입니다. 세계를 여행하며 문화콘텐츠 리뷰나 여행정보를 소개합니다. 책 <꿈이 다시 내게 말해> 출간. 작가들의 글을 출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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