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호수 끝에서 함께 한 하루, 그리고 33년의 호흡

by Elizabeth Kim

결혼한 지 29년. 연애 시절까지 합하면 벌써 33년이다. 시간이 이렇게 길 수 있다는 걸, 한 사람과의 여정이 이렇게 깊어질 수 있다는 걸 살아보며 알게 되었다.


결혼기념일이 아주 특별한 날인지도 모른 채, 그저 일상의 연장선처럼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Niagara-on-the-Lake)로 향했다. 가을빛이 잔잔히 내려앉은 거리, 붉게 타오르는 단풍잎, 그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오래된 사진처럼 부드럽게 흐려져 있었다.


호텔 프린스 오브 웨일즈(Prince of Wales Hotel)의 처칠 라운지(Churchill Lounge)는 마치 시간의 문을 통과한 듯, 오래된 영국식 기품이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벽난로의 불빛이 오래된 초상화처럼 조용히 우리를 바라봤다. 잔 속의 무알코올 칵테일에는 낯의 빛이 고요히 깃들었다. 거품이 사라진 자리에서, 눈빛이 마주쳤다.


“우리, 꽤 멀리 왔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렇게 웃었다. 29년의 풍경이 잠시 멈춘 듯했다.


피시 앤 칩스를 한입 베어 물며, 처음 캐나다에 왔던 그 해의 겨울이 문득 떠올랐다. 공항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이 낯선 땅에서 함께 살아가기로 했던 그 결심 말이다. 그때는 막막했지만, 지금은 그 막막함마저 추억이 되어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향한 빅토리아 커피(Victoria Coffee) 카페는 언제나 향기부터 따뜻하다. 진한 원두 향이 문을 열자마자 코끝을 감싸고, 창가에는 커피 잔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길게 드리워졌다. 그저 커피 향 속에서, 지나온 세월이 천천히 우러나오길 기다렸다. 말없이 커피를 마셨지만, 그 침묵 속에는 33년의 대화가 있었다. 한 모금마다, 함께 흘러온 시간의 결이 느껴졌다.


그리고 오후, Port Dalhousie(포트 달하우지)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햇살이 유리처럼 투명하게 호수를 덮던 시간이었지만 그날의 온타리오 호수는 고요하지 않았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그 바람에 밀려 호수는 마치 바다처럼 요동쳤다. 물결이 부서질 때마다 하얀 포말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그 위로 새들이 날아다녔다. 새들의 날갯짓이 유난히 역동적으로 보였다. 마치 더 멀리, 더 높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가고 싶은 마음을 품은 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우리도 그 새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폭풍이 불어도, 바람이 거세도 결국은 다시 날아오르는 — 그게 바로 ‘함께 살아낸 사랑’의 모양이 아닐까. 손을 잡고 호숫가를 걸었다. 말보다 조용한 온기, 시간보다 느리게 흐르는 호흡. 사랑이란 열정이 아니라 지속의 예술이라는 걸, 변함없이 옆에 있는 사람이 가장 큰 기적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내년이면 30주년이네.”

“그럼, 우리 이야기의 3막이 시작되는 거네.”


33년의 여정은 낭만보다 현실이 더 많았고, 설렘보다 인내가 더 컸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이 쌓여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순간, 현상호 작가님과 함께 작업했던 책제목이 떠오른다.


“여보,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29년째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람에게, 다시 처음처럼 고백한다.



20251103_134814.jpg
20251101_123359.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