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흑인 역사의 달, 나이아가라에서 듣는 목소리들

by Elizabeth Kim

2월 한 달, 캐나다는 흑인 역사의 달을 맞았다. 올해는 30주년이다. 나는 그 30년의 무게를,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200년의 발걸음을 따라가기로 했다. 나이아가라는 한때 자유의 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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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 이리(Fort Erie)의 아침은 고요했다. 강변에는 아직 사람이 없었고, 나이아가라 강은 회색빛으로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바위 위에 놓인 작은 명판 하나. Niagara's Freedom Trail. 1840~50년대, 이곳은 지하철도의 종착역이었다. 아니,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이들에게 이곳은 출발역이었다. 버팔로에서 페리를 타고 강을 건너면 캐나다였다. 자유였다.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거리가 삶과 죽음을 갈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Freedom Park에는 작은 조형물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앞에 서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곳에서 수천 명이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다. 그들은 울었을까, 웃었을까.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조금 더 북쪽으로 걸어가자 또 다른 명판이 나왔다. Little Africa. 1840년대 자유를 찾아온 이들이 모여 살던 정착촌. 인구 약 200명. 그들은 철도와 증기선에 쓸 목재를 잘랐다. 일했고, 가정을 꾸렸고, 공동체를 만들었다. 목재 수요가 줄자 마을도 사라졌다. 지금은 인근 묘지만 남아 있다. 바람이 차가웠다. 2월의 강변은 을씨년스럽고 적막했다. 그 적막 속에서 무언가를 듣는 것 같았다. 발소리. 목소리. 노래.


"Wade in the water 물을 헤치고 건너라." 이 노래는 탈출하는 노예들의 지도였고, 암호였고, 기도였다. 개들이 냄새를 추적하지 못하도록 물길을 따라 이동했던 사람들에게 이 노래는 생존의 언어였다. 휴대폰으로 이 노래를 찾아들었다. 록산 굿맨(Roxanne Goodman)이 부르고 존 다파아(John Dapaah)가 피아노로 반주하는 버전이었다. 이어폰을 끼고 강을 바라보며 들었다. 목소리가 물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강을 따라 북쪽으로, 북쪽으로 걸었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많아졌다. White Water Walk 남쪽 입구의 명판.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 그녀는 19차례에 걸쳐 수백 명을 자유로 인도했고 단 한 명도 잃지 않은 흑인 역사의 전설이다. 1850년 도망노예법이 제정되자 경로를 캐나다까지 연장했다. 세인트캐서린스에 거점을 두고 이 강을 수없이 건넜다. 명판에는 "국경을 넘었을 때, 모든 것이 영광으로 가득했습니다. 천국에 있는 것 같았어요"라는 그녀의 말이 새겨져 있었다.


다시 강변 길을 따라 퀸스턴으로 향했다. 언덕이 시작되고 길이 좁아졌다. 200년 전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별을 보며 북극성을 따라 밤에 걸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길은 방향이었고, 희망이었고, 약속이었다.


퀸스턴의 매켄지 인쇄소.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목재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캐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기. 이 인쇄기로 1793년 노예제 반대법이 인쇄되었다. 낡고 작고 흐릿한 글씨. 하지만 그 글자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삶을 바꿨다. 이 법은 노예를 즉각 해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노예를 들여오지 못하게 했고, 노예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25세가 되면 자유를 얻도록 했다. 대영제국에서 노예제를 제한한 최초의 법. 인쇄된 자유. 종이 위의 약속. 완벽하진 않았지만 시작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언덕 아래로 강이 보였다. 저 건너는 미국, 여기는 캐나다. 그 사이에 법이 있고, 언어가 있고, 인쇄기가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나이아가라 온더레이크에 도착했다. 예쁜 마을이었다. 19세기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고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King Street에서 Butler Street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한때 컬러드 빌리지(Coloured Village)였다. 1800년대 초, 흑인 로열리스트, 해방된 노예, 자유를 찾아온 이들이 정착했다. 약 200명이 이 거리를 걸었고 집을 짓고 아이를 키우고 교회를 세웠다. 분리된 게토(Ghetto)가 아니었다. 백인과 흑인이 나란히 살았다. 토론토의 리틀 이탈리처럼,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도시의 일부였다. 하지만 지금 그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건물 대부분은 사라졌고 길 이름만 남았다.


507 Butler Street. 윌리엄 스튜어드 하우스(William and Susannah Steward House)가 유일하게 남아 있다. 1837년 집주인 윌리엄 스튜어드는 켄터키에서 도망친 솔로몬 모즈비(Solomon Moseby)를 송환하지 말아 달라는 청원서에 서명했던, 그리고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감옥 앞에 모여 결국 그를 구출했던 이야기를 가진 곳이다. 두 명이 죽었고 모즈비는 탈출했다. 이 집은 그 저항의 현장이었다. 불이 켜진 창문들을 보았다. 지금은 누가 살고 있을까. 그들은 이 집의 역사를 알까.


Regent Street의 Voices of Freedom Park. 작은 공원이었다. 벤치에 앉아 교육용 앱을 켰다. 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이름은 윌리엄 라일리(William Riley)입니다. 1802년, 버지니아에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담담한 목소리 속에 무게가 있었다. 눈을 감았다. 바람이 차가웠지만 그 속에서 온기를, 연대를, 기억을 느꼈다. 이곳은 침묵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곳이었다. 잊혀진 이름을 부르는 곳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이아가라 온더레이크 박물관으로 갔다. 작은 박물관이었지만 역사의 진짜 조각들이 있었다. 윌리엄 라일리의 집에서 나온 통나무로 만든 벤치. 스튜어드 하우스에서 발견된 목재 판자. 낡은 사진 한 장. "역사는 퍼즐과 같습니다. 기증 자료 하나하나가 사라진 공동체를 복원하는 조각이 됩니다"는 큐레이터의 설명을 읽었다.


박물관을 나와 다시 강변으로 갔다. 이번에는 호수가 가까운 곳이었다.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이 물은 200년 전 해리엇 터브먼이 강을 건널 때도, 윌리엄 라일리가 처음 발을 디딜 때도 흘렀다. 흐름 자체가 증언이다.


박물관 도서 섹션에서 점원에게 물었다. "컬러드 빌리지에 대해 아세요?" "물론이죠. 우리 할머니가 자주 이야기해 주셨어요." 그 그 점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 마을은 사라졌지만 이야기는 남았어요. 그게 중요한 거 아닐까요." 맞다, 그렇다. 이야기는 남았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거리로 나왔다. 사람들이 산책하고 개를 데리고 나왔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 일상 아래 층층이 쌓인 시간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거리를 걸었던 수많은 발걸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는데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Wade in the Water! 우연이었다. 하지만 완벽한 우연이었다. 노래를 끝까지 들었다. 목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창밖으로 강이 보였다. 물은 흐르고 있었다. 물속으로 들어가라. 두려워하지 마라. 신이 당신의 아이들을 지킬 것이다. 노래는 고통과 희망을, 과거와 미래를, 물과 자유를 모두 담고 있다.


나이아가라는 폭포만 있는 곳이 아니다. 나이아가라는 경계였고 관문이었고 시작이었다. 이곳에서 누군가는 자유를 얻었고, 누군가는 저항했고, 누군가는 기억했다. 나는 폭포를 보지 않고도 나이아가라를 보았다. 명판을 읽고 강을 걸었고 사라진 마을의 흔적을 더듬었다.


물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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