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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zabeth Kim Dec 22. 2023

부의 아이러니

20만 원이 뭐길래!

캐네디언 드림을 꿈꾸며 이민을 가서 산지 어언 24년차다.  23년만에 한국에 와 현실과 비비며 생활하고 있다. IMF를 겪자마자, 1999년 떠났던 한국의 모습은 2023년 지금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도 많이 변했다. 우선, 너무 잘 산다. 여기서 “너무 잘 산다”는 물론 경제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다. 처음엔 와~~ 를 연신 내뿜으며 놀라곤 했다.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노선표를 열심히 보며 다니는 지하철. 토론토에선 상상할 수 없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에어컨을 밤새 켜고 사는 것은 내가 살던 한국세상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림이다.


출처: Pixabay


20년 만에 이런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며 놓친 부분도 있지 않나 조심스레 속마음을 꺼내본다. 얼마나 앞을 보며 달렸을까? 각박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20년 전, 한국은 우리만이 가진 “정 (情)”이란 것이 있었다. 처음 캐나다에 갔을 때 나의 고향인 한국이 가장 그립던 바로 그 “정(情)” 말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온 이민동기들과 함께 “밥”을 참 많이도 먹었다. 어쩌면 모든 이들이 옆도 보고 뒤도 보고 자기 삶에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숨 고르기 할 수 있어 다른이의 얘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최근 자전거를 타고 싶어 가다가 작은 사고가 있었다. 뒤에서 조심하라는 소리가 들려 우선 내려서 핸들을 바로 했다. 그때 왼쪽 옆으로 같은 그룹의 일행분 세 분이 지나가고 네 번째분이 뒤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시다가 내 자전거 앞바퀴에 걸려서 넘어지셨다. 너무 순식간이었고 놀란 상황에 그분 코밑의 인중이 까이고 벗겨진 걸 보고 사과를 했다. 명백히 서 있는 내게 뒤에서 추월하다 일어난 일이었다.


출처: Adobe Stock Image


병원 가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그것이 먼저라 생각했다. 댁 근처인 개봉에 있는 병원으로 가겠다고 해서 함께 이동했다. 내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도의적으로 도움을 드리고자 용달비도 지불하고 세 명을 태울 수 없어 나는 택시를 타고 갔다.  그런데, 그분은 용달을 기다리며 지속적으로 내게 경찰에 접수하면 돈도 더 나오고 힘들 거라는 얘기를 하셨다. 7~8주 병원 다니면 비용도 많이 나올 거라는 얘기도 간간히 하셨다. 허리도 안 좋다고 하셨다.


택시 타고 가는 길에 마음이 답답해 동생에게 전화를 하고 상황설명을 하고 있는데, 택시 기사분이 그 상황을 듣고 나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하셨고 돈을 요구할 테니 주지 말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되었다. 난 이 상황에 무슨 돈 길 하나 생각했다. 차 사고가 나도 각자 병원에 가지 이렇게 같이 가 주지 않는다고 했다. 더구나 나는 피해자고 그분이 가해자라 이런 경우는 더 없다고 했다.


병원 검사 결과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병원 수납 결과를 보려고 원무과에 같이 가려고 하니까 오지 말라고 하셨다. 병원 비용을 지불하신 후 나에게 다가오시더니 최소로 줄 수 있는 돈이 얼마냐고 물어보셨다. 당황해서 아무 말 못 하고 있었는데,  20만 원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오히려 내가 보상금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무척 당혹스러웠다. 그럼에도 도의적으로 치료비에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알겠다고 했지만, 그게 나를 가해자로 몰아간 댓가의 돈을 드린다는 의사는 아니었다.  버려놓았던 따릉이 자전거를 찾아다니느라 3시간 이상 맨 후에야 자전거를 반납할 수 있었다. 참 긴 하루였다.


출처: Adobe Stock Image


자전거를 찾으러 다니며 내가 탔던 따릉이에 문의한 결과 보험처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 내용을 그분께 전하니 보험은 싫다고 하셨다. 전화받는 것도 하는 것도 싫다고 보험을 안 한다고 하셨다. 이때부터 나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몸이 아프면 보험을 통해 제대로 치료받으면 좋을 텐데 왜 보험처리를 거절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분은 경찰에 접수하면 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주변분들에게 이 상황을 알렸고 다들 이상한 상황이니 돈을 주지 말라는 조언을 주셨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분은 매일 전화를 하고 이상하고 충격적인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지속정으로 경찰에 신고한다는 협박을 하셨다. 결국 난 다시 사건 장소로 가서 CCTV가 설치돼 있는지 여부를 확인했다고 그분에게 상황설명과 더 이상 연락하지 마시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분은 그 상황이면 내가 다쳐야 맞는 거라고 주장하셨고, 그분 말대로 난 발등의 뼈 두 개가 부러져 2달 이상 제대로 걷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분께는 연락하지 않았다. 20만 원이 뭐라고 이렇게 되었을까?


알고 보니 한국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왜 사실을 왜곡할 수밖에 없을까?  이런 상황들이 마치 평범하게 일어나는 규범(Norm)인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씁쓸했다. 1998년의 IMF, 2008년의 리만 브라더스 사태 등을 겪으며 언제부턴가 부의 양극화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든 사회가 되었다고 한다.


출처: Adobe Stock Image


난 1999년의 한국을 기억하는데 지금의 한국은 이런 점에서 너무나도 다르다. 이렇게 된 것이 꼭 그분의 잘못으로만 치부되어야 하는지 그것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아직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래서 잘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왠지 내 눈에 비친 한국사회는 겉으로 보기에 너무 잘 사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너무 각박한 부의 아이러니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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