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암환자로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다. 인스타그램으로 암환자의 일상을 꾸준히 공유하다 보니, 어느 날 건강 프로그램 제작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처음 출연을 제안받았을 때 사실 고민을 많이 했다. 방송에 출연한다는 건 자체가 세상을 향한 암밍아웃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알리고 싶은 사람에게만 선택적으로 암환자인 것을 밝혔지만, 방송에 출연하면 사정이 다르다. 알리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도 나의 투병소식이 알려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내 이름 아래 '유방암'이라고 적힌 이름표를 왼쪽 가슴에 달고 나간다는 건, "저는 암환자예요."라고 온 세상에 대고 외치는 것이니 글을 쓰는 것과는 또 다른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곧 내 이름을 건 책이 나올 것이고, 그럼 숨기고 싶어도 숨겨질 게 아니라 생각하니 못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물론 책이 출간되기 전에 방송으로 암밍아웃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결국 방송 출연 또한 암을 진단받은 후 나에게 찾아온 새로운 도전이라 생각하고 출연을 결심하게 되었다. 내가 암환자가 아니었다면 살면서 방송에 나올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살다 보니 암 덕분에 방송 출연도 다 해보네.'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또 곧 책이 나오게 되니 방송에 나가면 조금이라도 책을 알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있었다. (과연 책 이야기가 편집 없이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책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것은 난 여전히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에 불청객이 찾아왔지만, 나의 삶은 계속되고 있고, 나는 지금 글을 쓰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책은 말하자면 나의 글쓰기의 결실이자, 노력의 산물이다. 어떤 작가님은 책을 출산에 비유하기도 하던데, 그렇게 배 아파 낳은 자식처럼 소중한 책이니 방송의 힘을 빌어 조금이라도 더 알리고 싶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책이 잘 팔려 떼돈을 벌겠다는 물질적인 욕심이 아니라(인세로는 떼돈을 벌래야 벌 수도 없다.) 책을 통해, 더 많은 환우들과 만나고 싶고, 더 많은 분들에게 희망과 위로가 되고 싶다. 오늘도 암을 진단받고 힘겨운 싸움을 시작하는 환자분들께 암이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이런 마음이 인정 욕구인지, 자아실현의 욕구인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글을 쓰는 사람들은 남에게 인정받고 공감받고 싶어 하기 마련이니까. 나를 위한 마음이 곧 다른 이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이거야말로 1석 2조 아닌가. 글로써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갖는 소박한 바람이자, 간절한 소망이다.
사실 작가가 된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직장을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책이 나온다고 해도 겉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글을 쓰며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내 마음가짐이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세상에 나를 공개할 용기는 없었을 것이다. 방송 출연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소심한 나에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나는 이 모든 것은 글쓰기라는 마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암 진단 이전에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타인의 시선에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았다.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다른 이의 눈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비칠까 고민하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길 바랐다. 사람의 성격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아서 지금도 물론 다른 이의 감정을 신경 쓰는 편이고 남들보다 예민하고 세심한건 어떨 수 없지만 예전과는 조금 다른 용기가 생겼다고 할까. 여전히 상처받을까 두렵고, 상처받고 싶지 않지만 미움받을 용기도 생겼다고 해야 하나. 실패해도 괜찮다는 의연한 마음이 좀 더 커졌다고 해야 하나.
방송에 나와서 말을 버벅거릴 수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통째로 편집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또는 목소리나 얼굴이 내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흑역사가 될지도 모른다. 내 마음대로 지울 수도 없고, 세상에서 사라지지도 않는 그런 위험천만한 것이 방송임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전하고 싶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의 일에 관심이 없음을 잘 알고 있고, 다른 사람의 실수나 실패는 생각보다 쉽게 잊힌다는 것을 알기에. '혹시라도 잘하지 못해도 괜찮아.' 이렇게 계속해서 나를 다독이며.
실제로 내가 출연하는 분량은 매우 짧았고, 그마저도 어떻게 편집이 될지 모를 일이다. 하필이면 나의 인터뷰는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 5시간이나 되는 긴 녹화 시간 동안 계속 긴장한 상태로 있다 보니 마음도 몸도 힘이 들었다. 정작 내 차례가 되었을 때는 기운이 빠져서 머릿속에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게 허무하게 시간이 흘러버렸다. 예전 같으면 두고두고 그 시간을 곱씹으며 나를 자책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냥, '수고했어. 엘라야. 처음인데 당연히 그럴 수 있지. 다음에 혹시라도 또 기회가 있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비록 내가 주인공은 아니지만, 나의 분량은 미미하지만, 그래도 뿌듯하고 보람 있었던 건 이날 방송국에서 보고 싶은 얼굴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계속 SNS로 소통하며 인연을 이어갔던 아미북스의 조진희 대표님과 드디어 방송국에서 만났다. 조진희 대표님은 처음 보는 내게 출판사 독서모임의 리더를 선뜻 맡겨주시고, 암환우분들을 위해 재능기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신 감사한 분이다. 또 지금 이 순간도 좀 더 단단한 책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계신 우리 출판사 대표님도 나의 얼굴을 보러 방송국까지 와주셨다. 시간이 없어서 책 이야기를 많이 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대표님께서 잘하라고 응원해주신 덕분에 든든하고 힘이 많이 났다.
이 날 같이 암경험자로 출연한 분들과 새로운 인연을 맺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지는 발걸음이 참 가벼웠다. 그중에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동안 계속 소통해오던 분도 계셨고, 처음 알게 된 분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모두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처음 만났지만, 우리가 바로 친구가 될 수 있던 것은 같은 아픔을 공유한 사람들만이 가지는 동지의식 때문인 걸까. 마치 전우애처럼 끈끈하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서로를 향한 마음. 그 따뜻한 눈빛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녹화를 마치고 방송국을 나서자, 어느덧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간에 밤에 혼자 밖에 있어본 게 얼마만인지. 그 와중에 새삼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방송국 바로 앞에는 4개월 전, 출간 제안을 해준 S출판사의 사무실 빌딩이 보였다. 그때, 방송국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곳에서 촬영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사람 일이라는 것이 정말이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음을 다시금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며 감사한 얼굴들이 떠올랐다. 생애 첫 방송 출연이라는 이벤트에 응원과 격려를 보내준 가족들과 6개월 기적 카페 언니들, 핑크아미 언니들, 오뚜기 단톡방과 2030 환우 모임 친구들... 그러고 보니, 내 주위에 암으로 만난 인연들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니 암으로 인해 생긴 선물 같은 인연이 너무 많아 감사하고 행복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함께이기에 더 힘이 나고, 함께이기에 더 멀리 갈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다른 환우분들에게도 내가 힘든 치료 과정에 동행할 수 있는 든든한 암 친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제가 출연한 방송은 채널A <나는 몸신이다>이며, 6월 2일 (목) 저녁 8:10-9:30에 방영됩니다.
표준치료 이후 암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어요. 저의 출연 여부를 떠나서 암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오니 암환자분들과 가족분들은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 저는 현재 아미다해에서 주관하는 온라인 독서모임의 리더를 맡아 한 달에 두 번 암환우 독서모임을 운영하고 있어요. 독서모임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제 SNS로 연락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