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삶을 선택할까?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자기 수용'의 상태로 나아가기
처음 유방암에 걸렸다고 했을 때 ‘혹시 내가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암에 걸리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지난 몇 년의 삶을 돌이켜봤을 때 암에 걸린 게 당연할 정도로 임신과 육아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시험관 임신으로 몸은 축나 있었는데 태어난 아이는 지나치게 예민했다. 설상가상 어린이집 담임교사의 부적절한 돌봄을 겪으며 아이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 때마침 복직까지 겹치며 삶이 너무 피폐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맞는지 회의가 들었다. 아이를 감당할 수 없었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암이 내게 찾아왔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때 암에 걸린 것이 나를 살린 일이었다. ‘암은 병이 아니다’의 저자인 '안드레아스 모리츠'는 "암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기 때문에 암이 생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암은 우리를 죽게 하는 병이 아니라 내 몸이 살기 위해 보내는 신호라는 것이다.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말라고, 지금 당장 그렇게 사는 삶을 멈추라는 아주 강력한 신호. 나는 다행히 늦지 않게 그 신호를 발견했고 교사로서의 삶을 멈추었다. 엄마로서의 삶을 멈출 수는 없었기에 휴직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내가 치료를 하며 집에 있자, 아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입술을 물어뜯어 늘 피가 나고, 손톱을 쥐어뜯어 열 손가락을 모두 밴드로 칭칭 감아야 했던 아이가 어느새 달라졌다. 학대 사건 이후 다른 사람과 눈 마주치기를 불안해하고, 내 뒤에 숨던 아이가 지금은 누구보다 큰 소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처음 보는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고, 낯선 사람과 의사소통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한 마디로 마음이 안정된 것이다.
가까운 지인인 천주교 신자 분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하느님은 공평해요. 모든 것을 다 주지 않아요. 소은 엄마에게 아픔을 주신 대신 소은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거라 생각해요.’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아프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으리라. 그랬다면 지금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살다가 더 무섭고 손쓸 수 없는 병에 걸렸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비교적 빠른 시기에 유방암을 발견하고 치료할 수 있었음에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이 든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도 해주었다.
‘하느님은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다른 쪽 문을 열어주신다.’
처음 이 말을 듣고 무슨 말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인생을 살 때 고통도, 행복도 각기 다른 문이 있으니 한 가지 일에 너무 좌절하지도, 슬퍼하지도 말라는 의미 같았다. 엄마는 암환자가 되었지만 아이의 마음에 평화가 온 것처럼. 비록 암환자가 되었지만 작가로서 제2의 삶을 꿈꾸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럼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혹시 내가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암에 걸리지 않았을까?’
물론 내가 지금과 다른 인생을 선택했다면 암에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선택을 후회하거나 되돌리고 싶지는 않다. 남편과 소은이가 없는 내 인생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공평하시어, 내게 상위 1% 예민한 아이와 상위 1% 헌신적인 남편을 같이 보내주셨다. 남편의 사랑과 보살핌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아이를 키울 수 있었고, ‘암’이라는 인생 최대의 고비도 넘길 수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삶을 선택하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yes’라고 답할 것이다. 물론 암을 유발하는 나쁜 습관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우리가 암에 걸렸다고 해서 지난 삶 전체를 부정하지 말았으면 한다. 내가 잘못 살아서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동안 스스로를 돌볼 처지가 못 되었음을 인식하고 나를 다독여주었으면 좋겠다. 앞으로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암에 걸린 나를 불쌍히 여겨 ‘자기 연민’에 빠지기보다 암환자인 나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기 수용’을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자기 연민'에 빠져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것 같고, 내 인생이 불쌍하게 느껴지는가?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커지면 결국 계속 불행할 수밖에 없다. 나조차 나를 불쌍히 여기는데 내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반면 '자기 수용'은 자기 자신을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의 가치 기준이 자기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감정 따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상태. 그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수용' 상태이며 자기 수용의 상태에 도달한 것을 상담 성공의 필요조건으로 삼는다고 한다.
물론 자기 연민은 인간이 지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는 중요한 감정이기도 하다. 문제는 자기 연민이 지속되어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거나 우울증, 불안 등과 같은 마음의 병을 가져올 수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그러니 불완전한 자기를 받아들이고, 불완전한 현실을 받아들이자. "살다 보면 아프기도 하고, 암에 걸릴 수도 있는 거지!" 하고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져보자. 그럼 어느새 내 안에 불행의 씨앗은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photo by Sebastian Staines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