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며 늘 사람들과 나누던 덕담이다. 어찌 보면 해마다 늘상 하는 말 같고, 별생각 없이 나누던 이야기가 이토록 마음에 간절하게 와닿은 적이 있었을까. 여느 해처럼 사람들과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그 글자에 새겨진 마음이 이토록 사무친 적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한 해를 보내며, 그리고 새롭게 시작될 인생 제2막을 꿈꾸며 2021년의 마지막 글을 적어본다.
나는 올해 '30대 젊은 유방암 환자'라는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타이틀을 얻었다.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릴 줄 누가 알았을까. 사실 암환자가 된 지 8개월이 되었지만 아직도 가끔은 어리둥절하다. '내가 암환자라고?' 어느덧 일상을 회복해서인지, 지난 치료 과정과 힘들었던 순간들이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에게 그런 시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빛바랜 기억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아마 의식적으로 다른 일에 몰두하며 암이 주는 무게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 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다고 암에 대한 기억을 잊고 마냥 일반인처럼 살아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전이와 재발에 대한 불안감으로 마음이 약해져서도 안되지만, 마음 놓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면 안 되는 것이 암환자의 현실이랄까? 일반인과 환자의 경계를 넘나들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 지금 보면 평생 그 줄타기를 반복하며 사는 것이 암환자의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진단 직후 느꼈던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도 문득 자고 있는 딸아이를 볼 때 울컥하는 마음이 솟구칠 때가 있다. 딸아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손주를 낳아 내 품에 안겨줄 때까지 내가 건강하게 곁에 있어 주는 것, 아프고 나서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가 되었다. '그러려면 앞으로 40년은 더 건강하게 살아야 할 텐데, 할 수 있겠지?' 이런 마음이 고개를 들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신할 수도 없으며 사실 이건 자신감의 영역도 아니니까. 그래서인지 요즘은 연세 드신 할머니들이 참 부럽다. 우리가 평범하게 나이를 먹고, 할머니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사람들은 알까? 다른 이에게는 너무나 당연히 주어지는 노년의 삶이 나에게는 간절한 소망이라는 걸 그분들은 모를 것이다. 아직 마흔도 안된 아기 엄마의 소원이 할머니가 되는 것이라니!
3일 전, 그동안 쓴 원고를 드디어 출판사에 보냈다. 암환자의 본분을 잊고 새벽 3시까지 원고를 수정했다. 당장 아이는 어린이집 방학을 맞이하여 가정보육을 해야 했고, 남편은 다음날 복직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지금이 아니면 올해 안에 원고를 보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1월에 천천히 투고를 하라고 나를 만류했지만 나는 올해가 가기 전에 결실을 맺고 싶었다. 복직은 남편이 하는데 왜 내가 비장해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지금 하지 않으면 투고가 계속 미뤄질 것 같았다. 힘들었던 한 해를 보내며 원고도 내 손을 떠나보내고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일주일 정도 투고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면서 내 마음은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다. 문득 용기가 생겼다가도, 갑자기 자신감이 바닥을 치기도 했다. 출간 기획서를 고치고 또 고치고, 샘플 원고를 넣었다 뺐다 반복한 게 몇 번째일까. 도서관에서 책 쓰기에 관한 책을 몽땅 빌려와 전부 읽고, 출판사 투고에 관한 유튜브와 블로그, 브런치 글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러브레터를 쓰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공들여 메일을 작성했다. 처음 메일 전송 버튼을 누를 때 가슴이 얼마나 떨리던지! 마치 브런치에 내가 쓴 글의 발행 버튼을 처음 누를 때와 같은 심정이었다. 드디어 내 손을 벗어난 원고가 출판사의 손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무한반복 수정의 터널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기쁜 전화를 받았다.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다. 출판사의 연락을 받다니! 다음날 바로 출판사 대표님과 미팅을 하고, 대표님의 배려로 다른 작가님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 시간이 정말 꿈만 같았고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암환자였는데 사람들이 나를 작가님이라 불러주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감사하게도 그 후로도 여러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고, 지금은 어떤 출판사와 인연을 맺어야 하는지 고심하며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나의 부족한 원고에 손을 내밀어주신 출판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앞으로 좋은 출판사를 만나 더 성장하고 발전하는 내가 되었으면 한다.
하느님은 올 한 해 내게 시련을 주시면서 감사하게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셨다. 암을 진단받고 작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그 목표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고 행복하다. 내년에도 암을 치유하는 글쓰기는 계속될 것이다. 글을 쓰며 내 마음을 치유하고, 나아가 내 글이 다른 분들에게도 공감과 위로가 되기를. 나의 진심이 많은 분들에게 닿아 마음에 울림을 줄 수 있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