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입장료가 100원인 도서관이 있었다.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이었는데, 버스를 타고 일곱 정거장 정도 가야 했다. 중,고, 대학생까지 시험기간이 비슷해서 주말엔 대기 줄이 길었다. 자리를 맡으려면 한 두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문을 열기도 전에 줄 서는 사람들도 있어서 서둘러 나선다 해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벽과 나란히 줄지어 있는 대부분은 책을 보고 있었다. 야외 벽 옆은 어느 교실보다 고요했다. 누가 서 있든 책을 펼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같이 간 친구들과 나도 책을 폈다. 집중이 잘 돼서 이대로 하면 이번 시험은 더 잘 볼 수 있겠다는 기대도 하게 됐다.
줄서서 기다리다 먼저 들어간 사람이 한 명씩 나올때마다 차례로 책상 번호가 적힌 표를 살 수 있었다. 종이를 손에 쥐면 고생 끝에 관문 하나를 통과한것처럼 뿌듯했다. 먼저 들어간 친구는 다 들어 올 때까지 화단둘레에 앉아 기다렸다. 손글씨로 쓴 번호를 보며 서로의 자리가 어딘지 확인했다. 멀리 떨어졌거나 다른 열람실에 배정을 받으면 오랫동안 못 볼것처럼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옆에 앉아도 말 한 마디 못할텐데 말이다.
각자 자리를 찾아 갔다. 공부를 시작하려는데 책을 몇 장 넘기자마자 배가 고파졌다. 학교 시간으로 점심 시간이 되려면 한 시간도 더 남았는데. 사실 화단둘레에서 친구를 기다리는동안 날아온 라면 냄새를 맡았을 때부터 배가 고팠던거 같다. 일단 먹어야 겠다. 연습장 귀퉁이에 '밥 먹고 하자'라고 써서 소리가 나지 않게 간격을 두어 종이를 찢었다. 종이를 양면 딱지 모양으로 쪽지로 접었다. 애들 번호가 몇 번이었지? 들어올 때 번호를 나누긴 했는데 잊어버렸고 , 대강 위치 정도를 그릴 뿐이었다. 목을 쭉 빼고 훑어 봤다. 칸막이 사이사이 그 정수리가 그 정수리 같다. 머리카락도 안 보이게 꼭꼭 숨은 친구를 찾아내던 어린 시절 숨바꼭질 실력을 발휘해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찾았다. 쪽지를 들고 살금살금 기어가듯 움직이려니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지금은 단톡 방에 문자 하나 쓰면 될 일을 그 시절엔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정성을 들여야만 이른 점심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 명씩 쪽지를 전달했다. 그중 한 명은 ‘벌써?’라고 할 법도 한데 애들은 기다렸다는듯 조용히 의자를 뺐다. 쪽지에 적힌 ‘밥’이 ‘라면’이라는 걸 우리는 다 안다.
“그치, 먹어야 힘이 나서 공부를 하지.”
“꼬르륵 소리가 옆 사람한테 들릴까 봐 집중도 못하겠어.”
“대기자 많아지기 전에 먹는 게 나아.”
식당까지 가는동안 당장 먹어야 하는 이유를 수천 가지는 댈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면이 나왔고 우린 동시에 "우와~!" 했다. 다 먹을 때까지 풀어지지 않는 꼬들꼬들한 면발, 깔끔하면서도 짭짜름한 국물, 그 사이사이 박혀있는 탱글 하면서도 부드러운 작은 달걀 덩어리들. 알아서 상상며 기대했던 그 맛이었다. 상상했던 맛으로 배를 채우고 식당을 나오면 햇볕은 더 넓게 펼쳐져 있다. 방금 먹고 나온 라면 국물로 내장이 데워진 터라 햇빛을 받은 피부는 금세 노곤해졌다.
들어가야 되는데... 소화도 시킬 겸 조금 걷자며 삼십 분. 잠깐 쉬었다 가자며 화단 둘레에 앉아 한 시간. 하늘이 맑다면서 두 시간. 수다를 떨었다. 연휴 사이사이 낀 시험 기간엔 날씨가 늘 환상적이었다. 날씨를 만끽하고 있지만 시한 폭탄을 품은것처럼 마음은 불안했다. '시험 범위까지 마무리해야 하는데…' 몸은 여기 있지만 생각은 열람실 책상에 가 있었다. 자판기 커피를 뽑아 지나가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시험기간이 아닐 때 와서 저들처럼 여유를 부려야지.' 다짐을 하고 오랫동안 비워둔 내 책상으로 돌아갔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이 다짐은 조용히 잊혀졌다. ‘굳이 버스를 타고 도서관에? 시험기간도 아닌데?’
조마조마 하며 다니던 도서관에 커피를 들고 여유롭게 다닌 건 방학 때도 대학생 때도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난 후였다. 첫째 아이가 책 읽는 걸 좋아해서 도서관에 자주 가게 되었다. 둘째 아이는 책 읽기보다 활동하고 체험하는 걸 좋아했다. 요즘은 지역마다 도서관이 많이 있다. 이용요금도 무료인데다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마술, 연극, 놀이, 저자와의 만남, 음악회 등을 도서관에선 무료로 신청 할 수 있다. 둘째 아이도 도서관에 데려 갈 수 있던 것도 이런 프로그램들 덕분이었다. 다양한 활동을 찾아 다른 지역 도서관으로 투어를 다니기도 했다. . 시험기간도 아니고, 차로 한참을 이동해야 하는데, 아들 둘과 난 시간을 만들어 도서관에 다녔다.
아이들이 도서관을 찾는 또 다른 즐거움 중 하나는 라면이었다. 옛날처럼 끓인 라면은 아니고 컵라면. 가는 동안, 이번엔 어떤 걸 먹을지 이야기 하는 시간도 재밌었다. 각자 먹을 걸 고르고 물을 부은 뒤 기다리는 3분은 은근 설레는 시간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을 몇 가닥 들어 입에 넣더니 도서관에서 먹는 컵라면 이 최고라며 엄지를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보는데 예전 도서관 라면의 꼬들하고 탱탱한 면발이 입 안을 살짝 치고 갔다.
공연을 즐기고 든든히 배도 채운 아이들은 어린이 열람실로 들어갔다. 바닥에 배를 척 깔고 엎드려 키득거리며 만화책도 읽고, 심각한 표정으로 동화책도 읽고 있다. 편한 분위기의 열람실 위로 예전 도서관 담벼락의 고요함이 스르륵 지나가는것 같다.
책 한 권을 빌려 밖으로 나왔다. 정자에 앉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단 것 하나 넣지 않은 커피가 달게 느껴졌다. 햇볕이 넓고 두툼하게 피어올랐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내장을 덥힌 터라 햇빛을 받은 피부는 금세 노곤해졌다. 이 노곤함이 좋다. 화단에 앉아서, 산책을 하면서 여유를 누릴 수 있다. 몸과 마음 모두 이곳에서 편안하다. 학창 시절 이루지 못한 원을 원 없이 풀고 있다. 아이들은 자라서 어떤 모습의 도서관을 기억하게 될까? 오늘도 도서관 앞 햇빛은 참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