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되지 않는 글
#1
방송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린 지, 어언 6년 차가 되어간다. '작가'라는 말 때문인지 사람들은 내가 꽤나 글을 잘 쓰는 줄 알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작가 앞에 붙은 '방송' 덕분에 자꾸만 글의 감을 잃어가기도 한다. 내가 쓰는 글은 주로 누군가의 정리 멘트나 상황을 이어나가는 진행 멘트가 대부분이다. 가끔은 어떤 캠페인 등에 참여를 유도하는 멘트를 쓰기도 한다. 그렇게 몇 줄의 멘트를 적으면 돈을 받는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또 오히려 글을 쓰며 돈을 받는단 건 퍽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인데도 종종 내가 쓰고 싶은 글 앞에 앉으면 어딘가 모르게 작아진다. 돈이 되지 않는 글에 시간을 오래 들인 적이 언제였던가, 나조차도 감당이 안 되는 벅찬 글을 상상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하면 마음이 저릿하기도 한다. 시간에 쫓겨 글을 쓰는 삶에서 돈이 되지 않는 글에게 자리를 계속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겠다. 어딘가에서 얼핏 글이 호흡인 사람이 있다는 문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 문장 하나에 힘을 얻고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써 내려갔던 기특했던 시간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아, 옛날이여.
#2
분명히 바깥공기는 차가운데 이상하게 모기가 있다. 특히 자려고 불만 끄면 귓가에서 왱왱거리기 시작한다. 불을 켜면 자취를 감춘다. 이불을 걷고 내 살을 덫처럼 내놓고 한참을 망부석 되어 있어도 이상하리만치 모기가 오지 않는다. 그러다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다시 불을 껐을 때, 어김없이 모기가 나타난다. 작은 빛에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살아서 꼭 어두워져야만 나타나는 걸까… 간지럽다. 그래서 그냥 간지럼 완화 밴드를 샀다. 이왕이면 귀엽게 뽀로로가 그려진 걸로 6박스나 샀다. 눈이 펑펑 오는 한 겨울이 오기 전까지 이 6박스를 다 쓰지 않았으면 좋겠건만 지금도 귀 옆으로 왱왱거리니 장담할 수 없는 인생사다.
#3
갈 때마다 후회하지만 1년에 적어도 두 번씩은 꼭 가는 곳이 있다. 광장시장. 사람이 많아서 한 걸음 떼기 힘든 것도 한 몫하고 내 마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인심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퍼주는 떡볶이 조금. 그마저도 다 익지 않았거나 얼마나 오래전부터 끓였는지 물이 되기 직전에 떡을 씹었을 때다. 그럼에도 가는 이유는 아주 오래 다닌 식혜 맛집이 있고, 나에겐 새로운 것들이 넘쳐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번 연도 초에는 이불을 하는 집에서 누빔으로 된 가방을 샀다. 친구들은 기저귀 가방이나 할머니 가방 같다고 했지만 나는 폭닥한 가방의 촉감과 우아하면서 고풍진 느낌의 그 가방이 너무 좋다. 뭔가 힙해진 느낌도 들고, 적어도 내 주변엔 그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자부심도 있다. 날씨가 추워져서 그 가방을 꺼내 놓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해지는 게 사랑하는 사람 말고 더 있다니. 이게 행복인 것 같았다.
오늘은 꽃무늬 패턴의 털조끼를 샀다. 요즘 촌캉스다 뭐다 해서 왕왕 보이는 그 조끼 맞다. 그 유행에 편승하려는 건 아니고, 철저히 실용성을 생각하며 샀다. 강아지를 키우는 우리 집은 보일러를 뜨겁게 틀지 못한다. 강아지가 쉽게 더워하고 힘들어하는 걸 보니 그냥 내가 춥게 사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원체 몸이 차갑기도 하고, 탈이 잘 나는 체질이라 단순히 수면양말만 신어서는 해결이 안 되는 문제가 많았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배를 따뜻하게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털조끼를 생각해 냈다.
광장시장 초입에 털조끼를 파는 가게들이 즐비해있었는데 일단 배부터 채우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식당들에 비해 의류가게는 빨리 닫는다는 사실을 간과했고 어두워진 길목에서 열려 있는 곳이 없으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딱 한 곳 열려있는 가게를 발견했고 마치 오랜만에 보는 할머니에게 달려가듯 사장님께 달려갔다.
"몇 장 살 거야? 깎아줄게. 한 장 사면 만원이고 두 장 사면 장당 구천 원에 해줄게."
그래서 나는 두 장을 샀다. 천 원 아끼려다가 팔천 원을 더 쓴 꼴이 되었지만, 기분에 따라 골라 입을 수도 있겠고 빨래하는 동안에도 계속 따뜻함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사장님도 문 닫기 직전, 두 장이나 사는 젊은 여자가 반갑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기분도 좋아진다.
** 그래서 광장시장 식혜 맛집은 '다만 폐백'이라는 집이다. 식혜를 꺼내놓지도 않고 가게 어디에도 식혜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사장님께 쓰윽 다가가 식혜의 존재를 물으면 깡깡 얼어있는 식혜를 내주신다. 1.5L에 7천 원.
#4
꿀을 샀다. 무려 모히또 맛이 나는 꿀을 말이다. 웃긴 얘기지만 꿀이라는 것이 평소에 흔히 접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술을 마시지 못해 모히또라는 것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영역의 것들이다. 그런데 사봤다. 막상 모히또 맛이 나는 꿀을 맛보니 약간 막막했다. 이걸 빵에 발라먹기도 이상하고, 우유에 타 먹는 것도 좀… 박스에 붙은 설명서를 읽어봤다. 탄산수에 타먹거나 슬러쉬처럼 해 먹으면 맛있다고 하더라. 알려주는 방법대로 냉장고에서 시원한 탄산수를 꺼내서 만들어 봤고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다. 이래서 어느 영화에선 몰디브까지 가서 모히또를 마시자고 한 걸까? 그런데 발이 차갑다. 계절을 생각하지 못하고 잘못 샀다. 이런 날은 얼그레이 맛이 나는 꿀을 사서 따뜻한 물에 마셨어야 했던 거 같은데… 모히또꿀맛 에이드를 마시면서 조만간 얼그레이 맛이 나는 꿀의 이야기를 들고 오지 않을까 감히 추측해 본다.
**모히또 맛이 나는 꿀은 '워커비'의 제품이다. 사실 나의 최애는 따뜻한 물에 타먹어도 잘 어울리고 프랜차이즈 카페의 허니레몬티를 생각나게 하는 레몬 맛이 나는 꿀이었는데 품절이었다. 품절은 사람을 춥게 만든다.
#5
감을 다시 찾기 위해 한 번 글을 쓸 때마다 5편의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벌써 화력이 떨어진다. 생각보다 쓸 말이 없는 것이 조금은 아프다. 많이 쓰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많이 쓸 수 없음이 이렇게 통탄스러울 수가. 글 쓰는 것이 너무 좋아서 감을 잃는 것을 가장 슬퍼하며 쓰기 시작했는데 한 글자를 제대로 쓰기 어려운 것이 애통하다.
그래서일까, 사랑과 아픔은 동일어가 맞는 것 같다. 열렬히 사랑했더니 아픈 건지, 생각만 하면 맘이 아파서 사랑한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승자를 자주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