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채팅 따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즉석에서 실제로 만나는 것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인터넷이 발달하며 채팅 문화가 꽃을 피웠다. 평소 새로운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힘든 나였지만 채팅을 할 때만큼은 소심한 내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즉석으로 내뱉는 말보다 할 말을 썼다 지웠다 하며 상대방에게 어떤 말을 할까 고민하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시간이 날 때마다 PC방에 가서 친구와 함께 채팅을 했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다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대학생 오빠와 설레고 신기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한 번은 대화를 나눈 또래 남학생과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통화를 했다. 바르고 친절한 성격이라는 것을 전화 속 목소리와 그 아이의 말투로 알 수 있었다. 그런 데다가 목소리도 참 좋았다. 그 남자아이는 약간은 자랑인 듯 자기가 학교 밴드부 보컬이라는 이야기를 흘렸다. 밴드부 보컬이라서 목소리가 좋았구나. 왠지 밴드부 보컬과 아는 사이가 된 나도 기분이 우쭐해졌다. 그 아이도 나와 통화하는 게 싫지 않았던지 자주 통화를 했고 전화로 노래도 불러주었다. 요즘 같으면 우리는 썸 타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여러 번의 통화와 채팅을 하며 머릿속에 그 아이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그 실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남자아이를 만나야 할까 말까 고민했다. 만났다가 서로 실망하면 어쩌나, 그냥 이러다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이 맞지 않나, 만나서 만약 마음에 들면 그 후는 어떻게 되나. 온갖 잡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대담하게도 그 아이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우리는 서로의 학교를 알고 있었기에 교복을 입고 약속장소에 서 있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그때 갑자기 비겁해졌다. 먼저 그 아이를 확인하고 그 앞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약속 장소에 서 있지 않고 그 주위를 맴돌았다. 마치 지나가는 행인인 것처럼 친구와 팔짱을 끼고 곁눈질을 해가며 말이다. 그리고 약속 시간이 되었을 때 그 학교 교복을 입고 혼자 서 있는 남자아이를 봤다. 저 애가 맞나 하면서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그 자리를 지나가는데 역시 서 있다. 다시 한 바퀴를 돌아 그 자리를 지나가는데 역시 또 서 있다. 그 아이가 맞는구나.
그곳에 서 있는 아이는 밴드부 보컬, 멋진 목소리, 젠틀한 말투, 다정한 말들로 내 머릿속에 그려진 그 아이와 사뭇 달랐다. 그 순간 나에게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번개팅은 하면 안 되는 거다. 내 상상 속의 그 아이로 남겨두었어야 했던 거다.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갔고 바쁜 일이 생겼다고 말하고 얼른 돌아섰다. 그 아이도 내가 진짜 바쁜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했다.
나의 미성숙함이 아니었다면 좋은 우정으로 인연이 닿았을지도 모르는 그 남자아이. 아니다. 내가 그 자리에 먼저 서 있었다면 바쁜 일이 생긴 것은 그 아이가 되었을지도..
우리는 함부로 사람들에 대한 근거 없는 그림들을 그려낸다. 내일 있을 소개팅에서 만날 남자, 내 옆자리에 앉을 직장 동료, 새로 이사 갈 집에서 만날 이웃, 아이가 새 학년에 만날 담임 선생님 등. 그동안의 경험과 TV 등에서 추출해 낸 이상적인 모습들만으로 이런 사람들에 대해 그림을 그려두면 직접 그 사람들을 만났을 때 실망하기 쉽다. 나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생각하며 이럴 수도 있는데 왜 저런 사람인가 하는 실망을 하고, 나는 운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상대방에게는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사람에게 나의 그림을 맞추어 보고 당신은 왜 이러냐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점점 나이가 들며 되도록 사람들의 외적인 모습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아예 영향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노력한다. 도도해 보이는 이웃을 보며 순댓국을 먹고 이에 들깻가루가 낀 채 수다를 떠는 상상을 해보고, 험상궂어 보이는 새로운 동료를 보며 TV 드라마를 보고 눈물을 훔치는 따뜻함을 상상한다. 그러면 그들이 가진 진짜 매력은 뭘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내면을 알고 싶어 진다.
내 머릿속 그림과 다르다고 실망하지 말자. 내 앞에 살아 움직이는 이 그림들이야말로 내 상상 속 그림에서는 생각조차 못한 놀라운 경험으로 나를 이끌 수 있는 인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