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J를 강요당하는…
모든 직장이 마찬가지겠지만 학교에서도 일을 잘 해낸다는 것에는 정해진 기한 내에 일을 마칠 수 있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 처음은 바로 학사일정. 학교의 1년 계획이 세워지면 그 안에서 각 부서, 각 교과는 학사일정에 맞추어 각각의 계획서를 제출한다. 또 각각의 교과와 부서의 계획에 맞게 교사들 개인이 맡은 업무와 교과의 계획을 세운다.
나도 학년초 내가 맡은 업무와 교과에 관련한 계획을 세우고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그 계획서 안의 작은 업무들에 대한 계획을 또 세운다. 체계적으로 일을 진행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지만 결국 이런 계획들은 나에게 약속된 기한 내에 그 일들을 꼭 마쳐야 하는 족쇄가 된다. 때로는 내가 제 때에 끝내지 못한 일이 나 스스로를 곤란하게 할 때도 있지만, 사실 그것은 나에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학교의 일은 대부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내가 기한 내에 마치지 못한 일들이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업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나는 MBTI 제일 마지막이 P인 사람이다. 그것도 왕 대문자 P. 주말이면 아무 계획도 세우고 싶지 않고, 그날의 컨디션대로 움직이고 싶다. 늦잠을 자고 싶으면 실컷 누워 뒹굴거리고 싶고, 일찍 눈이 떠지면 커피 한 잔과 함께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또 활기가 그리워지면 쇼핑몰에 가서 구경도 하고 괜찮은 아이템이 눈에 띄면 하나 사거나 없으면 그냥 점심을 사 먹고 들어와도 좋고, 오는 길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조명들이 즐비한 공원을 거닐어도 좋다.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다는 말이다.
하지만 직장에서는 내가 세워서 결재를 받아둔 그 계획서라는 작은 방에 갇혀 주어진 시간 내에 미션을 완수하고 그 방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제때에 방에서 나오지 못하면 내 방문이 늦게 열리고 그로 인해 이 방을 지나야 하는 다른 사람들도 내가 열어놓았어야 할 그 문에 가로막혀 다음 방으로 가지 못한다.
P형 인간이라고 해도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걸 싫어하는 나는 좋든 싫든 제때에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모두 해내야 한다. 그런 나를 보고 동료들은 “쌤이 P라구요?”라는 말을 종종 한다. 나는 그렇게 직장에서 P형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하긴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는 것이 나는 한 학기 달력을 만들어 진도와 평가 계획을 각 반별로 모두 적어두기도 하고, to do 리스트에는 해야 할 일을 빼곡히 적어 완수한 일들에 체크표시를 해나가며 리스트를 정리해 나간다. 그런 내 메모를 보면 내가 봐도 J형 인간의 것으로 보이긴 한다. 하지만 내가 관찰한 진짜 J형 인간은 해야 할 일을 적어둔 리스트 따위는 필요 없어 보인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 자동으로 저장되고 그 일을 정해진 시기에 정확한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마음이 내내 불편한 듯하다. 그래서 일을 미루거나 잊는 일이 잘 없는 것 같다.
P형 인간인 나는 미뤄져도 남들에게 피해만 없다면 나에게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고, 그 일을 미룬다고 해서 마음이 그리 불편하지도 않다. 금세 잊고 현재 내 앞의 일에 몰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니 나는 빼곡하게 적어둔 그 리스트에 지워지지 않은 일들을 내 눈앞에 전시해 둬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해진다. 자꾸만 할 일 앞에 적힌 기한과 별표들이 나에게 자극을 줘야 내가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대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금세 편안한 마음으로 다른 일 먼저 하다가 진짜 할 일을 잊게 된다. 그렇게 나는 J형 인간이 되도록 스스로를 강요한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내 마음 내키는 대로만 살 수도 없고, 계획대로 해내야만 하는 일들이 꽤나 많기 때문이다. 뭐 J형 인간으로 오해받는 일이 조금 칭찬으로 들릴 때도 있어서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도 같고.
그렇게 나는 경력이 쌓이고 있는 직장인이고, 아이를 돌보는 엄마가 되고, 세금을 제때에 내고 가계 살림을 꾸리는 주부인 그런 어른이 되어간다. 전에는 없던 계획과 체계라는 것이 생기고 즉흥적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슬프지만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잃는 어른이 되어간다.
그래도 이 와중에 글을 쓰고 싶으면 언제든지 내 마음을 풀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이 공간이 남아있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