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

by 엘레니

요즘엔 종이책보다는 휴대폰이나 태블릿으로 독서를 하기가 더 쉬워졌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여행을 갈 때도 따로 책을 챙기지 않아도 되니 이렇게나 편리할 수가 없다. 특히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눈에 띄게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을 가진지라 책을 손에 들고 다니며 ‘나는 독서 좀 한다’하는 표시를 내는 것이 왠지 편치 않다. (하지만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은근히 뽐내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그럴 때 휴대폰을 꺼내어 이용하는 플랫폼을 이용해 독서를 하면 안성맞춤이다. 그러면서 영상물을 보고 있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독서를 오롯이 하고 있는 나에 대해 혼자서 뿌듯함을 느낀다. 조금 잘난 체하는 것 같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이것이 내가 남들에게 드러나지 않게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이렇게 유용한 온라인 독서임에도 불구하고 종이책을 저버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뭔가 그럴듯한 이유는 아니다. 사실은 지극히 주관적으로만 느낄 수 있는 책을 읽고 있을 때의 어떤 느낌이다. 이 주관적인 느낌은 누구라도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본 적이 있다면 느껴본 적 있지 않을까 싶다. 필요한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갔다가 계산대 앞에 진열된 베스트셀러 책들을 구경하던 중 한 권을 들어 목차를 살펴보고 처음 몇 줄을 읽어보며 나머지 뒷장들을 촤라락 넘길 때 느낄 수 있는... 아직 읽지도, 아니 심지어 그 책을 산 것도 아닌데 느껴지는 뿌듯함이랄까.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이랄까.

하지만 이 한 가지 느낌만으로 책이 특별히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엔 좀 부족하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도 가끔씩 있어야지 너무 자주 있으면 뭐 그리 새로울 것도 없어 곧 식상한 느낌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럼 나에게 종이책이 왜 꼭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종이책만이 전해 줄 수 있는 책의 또 다른 이야기 때문인 듯하다.

책마다 조금씩 다른 종이의 질감과 두께, 색깔 같은 것은 그 책을 기억하는 또 다른 내용이 된다. 사진이 포함된 다소 매끈거리고 광택이 있는 종이를 넘기며 색감이 살아있는 사진과 사진을 설명하는 작은 글씨들, 재생용지를 사용하여 누렇고 거칠고 두툼하지만 가벼운 책의 무게와 그 안에 담겨있는 지혜로운 말들, 보드라운 아이보리빛 종이 위에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삶에 대한 이야기들. 그렇다. 책을 읽을 때 그저 글자뿐만이 아니라 내가 만지고 넘겼던 종이의 낱장들도 나에게 무언가 전해주고 있었다.

독서를 다 마친 책들은 또 어떤가. 책을 읽다가 어떤 생각에 골똘히 잠겨있던 나의 모습이, 또 그때의 그 생각들이 그 책에 담겨있다. 무심코 펼쳐든 책에서 예전에 읽었던 구절이 눈에 보이면 그때에 내가 느꼈던 감상들이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걸고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대화를 나눈다. 책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시집에는 내가 좋아하던 시구를 부지런히 열어보았던 손이 남긴 시커먼 손때가 정겹게 나를 반긴다. 우연히 넘겨보던 책장에 남겨진 커피 자국은 나른한 주말에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나의 자국도 함께 남겨져 있고, 책을 읽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밀쳐둔 책 옆에서 열심히 라면을 먹던 나의 모습도 부끄럽게 몇 방울로 책 속에 숨어있다. 이러니 다 읽은 책도 쉬이 버리지 못하는 것 아닐까. (물론 책장이 좁아져 책을 버려야 할 만큼 많이 읽지도 않았지만...)

읽은 모든 내용이 다 머릿속에 기억되면 좋겠지만 그러기도 어렵고 사실 다 기억해도 사는 게 조금 피곤해질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책을 읽을 때의 다양한 감성들은 내 몸속에 분명 남아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책을 손에 들면 그 순간 나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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