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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니 Jul 19. 2023

팬트리를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

  두 아이의 등교와 막내의 등원까지 마친 뒤 집에

오면 방을 정리하고 청소를 시작한다. 오늘도 청소기를 들고 이리저리 바닥을 청소하다가 문득 팬트리가 생각났다. 언젠가 정리해야지 생각하고 미루기만 했었다. 그 안에 쓰지도 않고 넣어둔 물건들을 꺼내어 처분하고 상자를 비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물건들을 쑤셔 넣어도 자꾸 밀려 나왔다. 그리고 팬트리 문을 열 때마다 그 상자들이 거슬렸지만 필요한 것만 찾아서 빼고 문을 닫아버렸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래도 정리를 해야겠다 싶어서 바닥 청소를 마치고 팬트리 문을 열었다. 자주 꺼내어 사용하는 물건과 식료품들 그 옆에 쓰지 않고 쑤셔 넣은 그 물건들을 쳐다보았다.

  ‘저것들을 다 꺼내어야 정리가 시작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먹었을 때 해야지 싶어 김장 봉투와 쓰레기봉투를 꺼내왔다. 그리고 의자를 가져와 제일 위칸부터 정리를 시작했다. 위부터 차례대로 정리를 마친 후 가장 난도가 높은 아랫칸에 있는 그 문제의 박스들을 꺼내어 안에 있던 물건들을 봤다. 유통 기한이 몇 년은 지난 조미료와 왜 아직까지 가지고 있었는지 모를 이유식 스푼과 분유, 그리고 해마다 샀던 아이들의 물통들.

  ‘너희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구나!’

  과감하게 필요 없는 것들을 모두 쓰레기봉투에 넣고, 자리가 없어 아무 데나 쑤셔 넣어둔 물건들은 같은 종류끼리 분류해서 놓았다. 정리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뭐 그리 큰 변화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정리 전>                                            <정리 후>


  엄청난 정리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아서 인스타에서 볼 수 있는 사진들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리를 마친 팬트리를 보며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러다 생각해 보았다. 마음 정리도 그 과정이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래서 마음이 답답하고 어지러울 때 청소를 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닐까.




  집처럼 마음을 쉽게 정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것은 쉽지 않다. 우선 정리를 하기 위해서는 그 안을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묵은 짐들이 잔뜩 쌓여있는 팬트리 문을 열어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봤을 때 실체가 없는 그것들을 어떤 방법으로 정리해 낼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질러지고 뒤섞인 것들을 세심하게 보아야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있다. 만약 내 마음의 방을 어지럽히던 것이 슬픔이었다면 그 슬픔은 어느 상자에서 밀려 나왔는지 살펴봐야 한다. 어떤 일의 실패 때문인지, 내 몸이 아파서인지,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인지,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인한 것인지,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등등 여러 상자들을 살펴보며 그 슬픔의 원인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상자 밖으로 그 슬픔을 밀어내었던 원인이 되는 일을 해결하거나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상자를 비우고 슬픔이라는 감정은 잘 정리하여 상자에 다시 넣어두어야 한다.

  살펴보니 지금 내가 지니고 있지 않아도 되는 감정이었다면 과감히 쓰레기봉투에 넣어야 한다. 만약 타인이 단순히 나의 감정을 해치기 위한 악의적인 말로  마음을 다치게 했다면 나는 그것 때문에 우울과 분노를 마음에 품고 있을 필요가 없다.  따위 말로밖에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없는  사람과  말에 대한 생각은 상자에서 쏟아버리고, 그로 인한 감정들은 미련 없이 쓰레기봉투에 넣고 꽁꽁 묶어서 내다 버려야 한다. 그런 감정을  안에 두고 괴로워할 이유는   가지도 없다.


  물론 어떤 일을 겪어내느라 가지게 된 감정을 물건 정리하듯이 단시간에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원인을 확인하고 감정을 정리하는 동안 그것이 내 몸과 마음 모두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말해둬야 한다. 이 감정은 저 상자에 들어있는 것이고 저 상자들은 내가 인생을 살아가며 마음속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들을 모두 없앤다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필요할 때 적당히 그것들을 꺼내어 느끼고 표현하고 다시 정리하며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그리고 살다 보면 어떤 상자에서는 좋은 감정을 꺼내어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정리를 마치고 뭔가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위에 있는 팬트리 사진에서 보듯이 틀린 그림 찾기처럼 찾아보아야 변화된 곳을 조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전보다는 편해졌다는 것을, 그리고 나아졌다는 것을 천천히 느낄 수 있다.


  마음의 방을 들여다보기 싫어서, 혹은 들여다보았어도 정리하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두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방을 청소하는 것에는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든다. 그러므로 집안을 청소하듯이 마음도 주기적으로 한 번씩 들여다보고 어질러진 마음을 정리하고 청소하고 비워내야 한다. 그래야 그 방에 새로 들어올 물건도 감정도 자리를 잡기가 쉬워진다. 그리고 자꾸 새로운 것들을 들이고 겪어봐야 나에게 맞는 더 아름다운 방을 완성해 나갈 수 있다.





  팬트리 청소를 마쳤다. 앗.. 그런데 옆에 나뒹구는 김치통 하나가 이제야 눈에 보인다. 어쩔 수 없다. 가끔 이렇게 해결하지 못한 것은 내가 잘 볼 수 있는 곳 한쪽에 두었다가 자리가 생기면 얼른 그곳에 정리하면 된다. 일단 김치통은 한 번씩 꺼내 쓰는 두루마리 휴지 아래에 넣어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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