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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니 Sep 20. 2023

바람이 달려온다


  오늘 드디어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끝났다. 학교 공사 일정이 있어 여름방학으로 꼬박 두 달을 채우고서야 개학을 했다. 두 아이의 여름방학 동안 덩달아 늦잠을 자고 등원도 느지막이 하던 막내는 오빠들이 평소와 다르게 일찍 일어나 등교 준비를 하는 모습에 자기도 눈을 번쩍 뜨고는 학교에 같이 가고 싶다고 성화다. 엄마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얼른 준비를 시켜서 함께 나가 학교까지 갔다. 교문에 서서 오빠들에게 몇 번이나 손을 흔들어주고는 집으로 돌아와 어린이집 가방을 챙겨 들고 시간 여유가 있어 걸어서 등원하기로 했다. 어른 걸음으로는 10분이 채 안 되는 거리지만 아이와 함께 걸으면 그 두 배는 족히 걸린다. 처음에는 신나게 걷던 아이가 반절쯤 가서 힘이 들단다. 예상한 일이었기에 아이 앞에 앉아 등을 내어주고는 어부바를 하자고 하니 아이는 신이 났다.


  걸어가는 길에 바람이 불어온다. 아이를 업고 가느라 땀이 송골송골 맺혀가는 이마와 목덜미가 시원해졌다. 내 등에 업혀 있는 아이의 얼굴에도 시원한 바람이 닿았는지 아이가 말한다. "아~ 시원하다. 엄마! 바람이 쌩쌩 달려오네." "바람이 쌩쌩 달려온다구?" "응! 바람이 쌩쌩 달려와." "그래. 정말 바람이 쌩쌩 달려오네."


  오랜만에 아이와 걷는 등원길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제법 따뜻해진 봄이 찾아왔을 때 함께 걷다가 아이를 업어주던 길을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이제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는 가을의 시작쯤에 또 걷는다. 아이가 느낀 바람결이 나에게도 느껴지고, 쌩쌩 달려오는 바람의 보이지 않는 몸짓을 잠시 상상하며 웃음 지었다. 그래, 그저 시원하게 분다는 말로만 표현하기에는 성에 차지 않았다. 세차게 부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후에 내릴 비 때문인지 물기를 가득 머금고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은 제법 묵직한 느낌이었다.




  나는 비가 오는 날도, 해가 쨍쨍 내리쬐는 날도 밖에 나가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눈이 오면 예쁘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밖으로 나가 눈을 직접 맞아야겠다는 결심은 신나게 달려 나가는 아이들을 뒤쫓을 때만 한다. 하지만 바람은 다르다. 왠지 모르게 바람이 좋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올 때면 어디선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듯이 반가운 마음에 기분이 좋아지고, 맑고 상쾌한 바람이 불면 어디든지 떠날 수 있을 듯이,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을 듯이 가슴이 설렌다. 세찬 바람이 내 머리를 뒤집어놓을 때면 나부끼는 머리칼과 옷을 부여잡고서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고, 때로는 나도 모르게 내지르는 외마디 소리를 바람에 흘려보내며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이제는 바람이 내 옆의 아이들을 향할 때를 느낀다. 1월, 매서운 겨울바람이 아이의 작은 손에 닿을까 그 손을 꼭 감싸 쥐고 걸었다. 그리고 봄의 살랑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꽃씨를 들고 아이와 후후 불어 멀리 씨앗을 날려 보내주었다. 무더운 여름에는 가끔 불어와주는 더운 바람이라도 고마워하며 여전히 식지 않은 아이들의 땀을 그늘 아래서 닦아주었고, 이제는 어느새 가을의 냄새가 묻어나는 바람이 불어온다. 아이와 바람의 선선함을 느끼며 걷기에 딱 좋은 날들을 얼마쯤 지내다 보면 금세 날씨가 서늘해지고, 곧 아이의 두툼한 외투를 꺼내어 입혀야 되겠지 싶다.


  올해 나를, 그리고 아이들을 스치던 바람들이 몇 번 바뀌었다 싶은데 벌써 10월을 바라보고 있다. 오늘 바람이 그렇듯 시간도 나에게 달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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