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장치라고는 놓인 것이 없는 빈 무대. 공연 시작 시간이 되어서야 배우와 스텝 몇 명은 무대 위에 흰 천을 걸고, 텐트를 세우고, 극 중 사용될 영상을 위해 카메라를 설치한다. 분명 공연이 시작되었고, 공연자가 ‘무대 위’에 있는 것도 맞는데, 무대 위의 행동이 연극을 위한 ‘연기’ 인지, 아닌지 혼란스럽다. 2021년 11월 3일부터 11월 9일까지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공연된 연극 <보더라인(이경성 연출, 위르겐 베르거 작, 공동창작)>은 ‘경계선상’이라는 제목답게 극 내내 그렇게 쉽게 ‘연극’ 또는 ‘연극 아닌 것’으로 정확하게 분류해낼 수 없는 요소들을 제시한다. 영상 속 한 배우가 철조망 위에 긋기 시작한 선이 계속해서 이어지듯, 모든 곳에는 경계선이 있고, 따라서 경계선 위에서 양쪽에 동시에 발을 걸친 존재들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공연의 첫 부분을 마주했을 때와 같이, 경계선 위의 존재들에 대해 혼란 또는 당황스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무의식중에 그것을 경계선의 한쪽으로 분류하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은 그렇게 경계선상에 놓인 형식을 통해, 국경이라는 경계선상에 서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경계선 위의 형식
작품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탈북민, 과거 동독 출신의 배우, 남한출신으로 앞선 이들과 소통을 하려는 사람들. 그들은 다른 배경 속에 놓여있지만 하나의 동시에 하나의 공연을 만들고 있다. 출신이 다른 것뿐만 아니라 공연 내내 그들은 서로 물리적으로 다른 공간에 위치하면서 동시에 ‘줌(ZOOM)’이라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한 공연을 만들어나간다. 공연의 요소들을 살펴볼수록, 작품의 형식은 모든 경계 위에 놓여있다고 느껴진다. 공연은 기승전결의 드라마가 아니라, 수년간의 인터뷰와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듯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성격을 표방한다. 그러나 조사한 자료들의 선정과 배치 과정이 있다는 점에서 마냥 객관적일 수 없으며, 어느 정도 드라마가 발생한다. ‘인터뷰’를 텍스트로 옮김에 따라 모든 텍스트는 인위적인 ‘대사’가 아닌듯 하다. 동시에 현재진행중인 실제 상황에서 나오는 말들이 아니라 배우들이 타인의 말을, 또는 과거 자신이 뱉었던 말을 어떤 방식으로든 재현하는 것이기에 ‘대사’이다. 무대 위에 실재하지 않는 인물들이 영상 매체를 통해 극을 이끌어가는 부분이 많지만 동시에 작품은 극장에서 실재하는 연극이다. 국경이 다른 배우들은 다른 언어로도 서로 소통하고 있지만, 대본 밖에 있는 일상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소통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소통의 한계마저도 실제 상황 같지만, 대본에 있는 상황이다.
사실 어쩌면, 이러한 형식들이 작품의 독특한 형식인 듯 나열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극 중 내용에서도 드러나듯, 나라 사이의 국경을 자유롭게 넘을 수 있는 유럽에서 ‘국경’이라는 경계는 크게 인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동독과 서독의 경계가 있었던 독일에서는 조금 다르게 느껴질지도 모르고, 남한과 북한의 경계가 있는 한국에서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진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어디가 어느 나라의 국경에 속해있는지가 굉장히 중대한 문제이다. 이처럼 경계를 실감하는 것은 한 사람이 어떤 사회에서 자라며 무엇을 배웠는지와 관련이 있다. 필자를 포함한 사람들이 이 작품의 형식을 독특하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연극은 ‘드라마가 명확하고 인위적인’ 것이라고 오랫동안 배우고 인식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경계를 넘어 부르는 가사 없는 노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분류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할 때, 자신의 인식체계 안에서는 ‘모르는’ 존재를 마주할 때 ‘이상하다’ 또는 ‘불편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탈북민’, ‘난민’과 같은 이름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 이름 자체가 ‘어딘가 에서의 이탈’을 뜻하는 것으로, 경계선 위에 위치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모른다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자신이 속한 경계선 안쪽, 또는 바깥쪽으로 분류하려고 한다. 한 탈북민의 인터뷰에서는 ‘자신을 탈북민으로만 보지 말아달라’고 하고, 배우의 지인이라는 탈북민은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달라’고 했다는, 겉보기에 상반되어 보이는 입장은 그렇게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경우에는 안다는 것이 노력을 필요로 하기에 ‘모르려고’하는 경우도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의 난민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 경우일 것이다.
사실 ‘국경’이라는 큰 문제에 관련된 예시들을 접했기에 눈에 띄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나 경계의 양쪽에 발을 걸치고 살아왔을 것이다. 지금은 자신이 ‘집이라는 공간을 가장 안전한 공간으로 인식하는’ 부류에 속한다고 믿지만, 과거에는 알고보면 ‘집이라는 공간이 안정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자랐을지도 모른다고 인정하는 한 배우의 말처럼. 극의 마지막 장면에, 분필로 선을 긋던 배우는 극장 안으로 들어와 무대 위까지 선을 긋고 나가서 계속해서 선을 긋는다. 무대 위의 텐트는 거처이면서도 임시 거처이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 경계선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이동할 수 있다. 그게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분류의 민낯일 수 있다. 견고한 공간으로서의 집에 대한 정의가 흔들리듯, ‘나는 경계선의 한 쪽에 분명하게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다’는 안정감과 안락함 자체가 허물일 수 있는 것이다. 화면 너머 집의 형태들이 보이지만, 무대 위에 ‘실재’하는 것은 텐트이다. 그만큼 모두의 정체성의 실체는 ‘텐트’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그 텐트를 인정하고 텐트 속에서 유연하게 사고하고 이해하는 것이 공존의 어떤 지향점이 될 수도 있겠다.
무대 위의 배우는 무대 위 그어진 선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그러는 동안, 무대 위의 배우, 그리고 줌 프로그램 너머 각자의 배경에 있는 배우들은 서로 화음을 만들며 아무 가사 없는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처럼 ‘경계선’이라는 것은 분필의 행로만큼이나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지금 관객들의 눈앞에도 존재한다. 배우들이 함께 존재하는 듯 하지만 사실 물리적인 경계가 있다는 것이, 공존인 듯 하지만 실제로 공존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가끔 의문이 생기곤 하는 모습이, 과거보다 더욱 더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일 수 있다. 그러한 사회 속, 탈북민의 이야기나, 난민 수용에 대한 기사의 댓글에서, 출신에 따라 그 경계선을 구분 짓고 완벽하게 타자로 배척하려는 사람들의 태도가 드러난다. 무대 위에는 독일어를 공부하며 독일의 사람들과 실제로 소통하려는 한국인 배우도 있다. 이는 적극적인 공존의 시도라 할 수 있지만, 결국 경계선을 지우는 행위라기보다는 경계선의 저쪽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오는 행위이다. 마지막 장면의 가사 없는 화음은 어쩌면 그보다 더 적극적이고 가장 이상적인 방법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를 바라보며 어느 국경과 어느 사회에도 상관없는, 한쪽으로의 번역을 거치지 않고 닿을 소통을 하는 것이다. 보다 다문화를 꿈꾸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무대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그 경계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함께 노래하고, 어떤 경우에는 경계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되 훌쩍 뛰어넘어 보려고 시도하기도 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경계선의 이쪽과 저쪽을 바라보느라 서로를 마주하지 못한다.
경계선은 아직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작품은 ‘경계’라는 것을 우리가 매일 마주함을 은유하고, 경계에 대한 인식체계 전반을 이야기하는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소재에 있어서는 우리 삶의 가까운 부분에 존재하는 세세한 경계들을 포괄하지 못하고 ‘국경’이라는, 실질적으로 다소 거리감 있게 느껴지는 문제만을 특정지어 다룬 것은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 시대의 공존과 소통에 대한 유의미한 고찰의 시작점이 되고 있다는 것은 작품의 분명한 의의가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