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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n Jan 02. 2022

우리 시대의 믿음과 신화에 대하여: 연극 <순교> 리뷰

극장 안을 뒤덮는 어두운 초록빛 조명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낯선 시공간으로 진입하는 느낌을 준다. 무대나 객석이라 불릴 공간들의 뚜렷한 구분도 없이 원형으로 둘러앉은 관객들의 모습은, 원초적인 기괴함을 자아내는 조명의 색채와 맞물려 공연보다는 어떤 의식의 현장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무대 세트라고 불릴만한 것은 공간의 중앙에 놓인 의자 몇 개와 그 위를 비추는 조명 하나가 전부이다. 대본과 연출에 의해 생성되는 이야기의 큰 틀은 있지만, 관객이 스스로 미니멀한 세트 위에 구체적 장면들을 덧씌우며 공연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의식과 닮았을지도 모른다. 

지난 10월 9일부터 17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연극 <순교 (호시 신이치 원작, 전인철 연출)>의 배경은 죽은 자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됨에 따라 죽음의 공포가 소거된 사회이다. 그 속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다수와 살아남기를 선택한 소수의 이야기를 그린다. 삶과 죽음, 그 무거운 선택의 중심에는 한 시대의 신화와 믿음이라는 요소가 자리 잡고 있다. 흔히 과학기술과 이성 이전의, 야만의 시대라고 불리기도 하는 때의 문자 그대로 ‘신’에 대한 신화에서부터, 오늘날 과학기술과 이성을 가진 인간을 향한 또 다른 신화로까지 명맥을 이어 온 믿음이 사람들의 생과 사를 결정한다.     





믿음의 이야기믿음의 형식     

한 남자가 자신이 발명한 기계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날이다. 그는 사별한 아내를 그리워하던 끝에, 죽은 자와 이야기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한 것이다. 그런데 기계를 통해 들리는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하나같이 사후의 세계를 예찬한다. 극에도 직설적으로 나타나 있듯, 사람들이 삶을 살아갈 의지를 갖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는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에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고, 그로 인해 삶이 힘겹더라도 살아있으려는 의지를 놓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기계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무게를 쉽게 내던지고 연이어 죽음을 택한다. 

공연의 첫 시작부터, 배우는 관객들 사이에 앉아 극을 진행하며 극 속의 공간을 관객의 공간까지 확장시킨다. 의자 외에 별다른 세트가 없는 공간에서 관객이 앉은 곳을 행사장으로, 기계가 놓인 야외의 공간으로 상상하게끔 돕는다. 소설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서술적인 문장들은 특정 인물의 정서나 입장을 강요하지 않는 관조적인 태도로 관객 스스로의 상상의 여지를 넓힌다. 거기에 이를 낭독하는 배우들의, 눈앞에 상황을 그려내는 듯 생생한 말하기 방식은 그 상상을 극대화시킨다. 이러한 공연의 방식, 또한 그 속에서도 실존하는 배우의 형상을 제시하는 부분과 오로지 관객의 상상으로만 채워야 할 부분의 완급조절은 텍스트 속 ‘믿음’의 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극 중에 직접적으로 언급되듯이, 이성이 세상을 지배하기 이전, 즉 자연의 많은 일들을 논리적으로 규명하기 힘들었던 시기에 사람들은 두려운 게 많았다. 그래서 신을 믿었고, 신화를 믿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죽음 이외에 인간이 규명하지 못할 것들은 없다고 생각되었다. 게다가 이제는 죽음이라는 그 최후의 무지와 두려움마저 사라져 신이라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힘을 빌릴 필요가 사라졌다. 하지만 모순적으로 사람들은 실재하는 대상을 보지 못한 채로도 기계 너머의 목소리만을 굳게 믿으며 죽음을 결정한다. 과학기술과 기계에 대한 새로운 신화, 더 나아가 모든 것은 인간이 알 수 있다고 믿는 인류와 자기 자신에 대한 또 다른 은유적 신화가 기존의 신화를 대체한 것이다.

무대에는 주요 소재인 기계가 실재하지 않는다. 입증할 증거가 없는 기계와 그 작동은 배우들의 발화로 표현된다. 극 중 등장하는 사람들 역시 실체가 없는 존재의 목소리만 듣고서 기계의 작동과 실제로 보지 못한 사후의 낙원의 모습을 믿는다. 이를 지적한 부분은 극을 관람하는 관객에게도 확대되는 것이다. 관객은 무의식중에 배우들의 말만으로 무대 위 대상의 실재를 가정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 부재를 체감하며 자기 자신과 극 중 인물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기도 한다. 배우의 목소리로만 존재가 가정되는 부분은 극이 진행될수록 늘어난다. 그러다가 극의 거의 막바지,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불도저로 시체를 치우며 살아가는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공연 장소에 의자와 조명 외에는 완전히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인물들이 자신이 죽음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기계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다른 사람들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믿지 않아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공연을 보는 관객의 태도에도 더 극단적이고 적극적으로 확장된다. 전통적 연극에는 ‘Suspension of Disbelief’, 즉 불신의 중지라는 말이 있다. 무대 위 일어나는 일이 가짜이고 배우들의 연기에 불과하다는 불신을 잠시 접어두고, 사실이라 믿으라는 것이다. 연극 <순교>는 그 불신의 중지를 개인의 내면으로 돌려놓는다. 배우들이 말하는 모든 묘사를 빈 공간에 스스로 채워야 하는 관객은 배우라는 사람들과 그들이 말하는 ‘기계’에 대한, 또 자신과 마찬가지로 실제 무언가가 무대 위에 있는 듯 관람하는 ‘다른 사람들’, 즉, 관객 집단에 대한, 그리고 무대 위 세계를 그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을 접어두고 공연을 마주하게 한다. 하지만 새로운 신화를 믿던 이들을 소멸과 함께, 자신이 무엇을 믿지 않아 살아남았는지를 직설적으로 논의하는 생존자들의 대사로 인해 관객들은 새삼스레 빈 무대의 민낯을 보게 될 것이다. 이로써 관객은 자신의 당연하게 가져갔던 믿음에 대한 의심을 체험하며 기술과 이성적 인간에 대한 만연한 신화에 대한 생각의 씨앗을 가져갈 것이다. 

연극 <순교>는 이처럼 텍스트에서 말하는 오늘날의 믿음과 신화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다층적인 믿음을 유발하는 형식을 통해 관객의 이야기로도 효과적으로 확장시켰다고 생각한다.      


빛 가운데 마주하는 것들     

‘계몽’과, 그 계몽을 이끄는 ‘이성’은 오래전부터 ‘빛’과 관련되어 왔다. 영어로 계몽을 뜻하는 Enlightenment는 ‘빛을 준다’는 뜻이고, 각각 계몽을 의미하는 독일어 Aufklärung, 불어 Lumières 에서는 단어의 어원 자체에서 '밝게 만듦'이나 '빛'을 유추해낼 수 있다.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의 빛'이 무지몽매함과 미신, 종교적 광신, 불합리한 관습이나 전통 같은 어두움으로부터 사람들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관객이 마주하는 것을 의자와 이를 비추는 ‘조명 빛’이다. 그 빛 아래 과학기술의 상징인 기계가 등장하고, 덕분에 사람들은 유일한 무지였던 죽음마저 ‘알게’되는 완벽한 이성적 앎의 세계로 들어서는 듯하다.  

하지만 그 빛 아래에서 죽음을 택하는 인물들의 태도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과장되고 경박하게 그려지는데, 무거운 소재와 대비되는 사람들의 태도는 논리를 벗어나는 것으로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죽은 자들의 커다란 웃음소리 같은 자극적이고 직접적인 요소들의 사용은 일종의 야만적인 느낌마저 느끼게 한다.

그리고 조명 빛 아래 빈 공간에 관객이 그려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로 줄줄이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모습, 기계를 부수려는 자를 살해하는 사람들의 모습, 거리를 가득 덮은 시체 더미 등 잔혹하고 야만적인 것들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배우들의 비이성적인 모습과 함께, 현재 이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의 내면에서 나온 잔혹성과 야만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극 중 죽음 이후에 대해 깨달으며 ‘앎’의 최고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이들은 광적인 죽음에 대한 욕망에 잡아먹혀 소멸한다. 이처럼 이성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빛 아래에서 타인과 자기 자신의 비이성을 마주하며, 관객은 인간이 합리성을 바탕으로 세계를 다 이야기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신화임을 몸소 깨닫게 된다.     


- “이제 새로운 사회를 만들게 되겠네요. 어떤 곳이 될까요?”, “그걸 누가 알겠어요.”     

기계를 통해 죽음을 선택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극의 막바지에 나누던 대화이다.

극 중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기계 너머의 목소리를 믿고 죽음을 택한다. 그 이유는 하나이다. ‘죽음 너머 사람들의 목소리가 행복을 말하고 있어서.’ 기계 이전에 그들은 죽음 너머 현실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삶을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 너머에서 목소리를 듣고는, 그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죽음 너머에 있는 세계에서 다른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그렇게 사람들이 알고 있던 생과 사의 위치가 뒤바뀐다. 사람들이 결국에 더 잘 ‘살기 위해’ 죽음으로 가고, 삶이 죽음보다 끔찍하다면 결국 살아 있는 것이 죽은 것과 같지 않을까.  

작품의 제목은 ‘순교’이다. 즉, 모든 압박이나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뜻이다. 작품이 제시하는 모습을 보면, 결국 박해를 받는 이는 살아남을 자이다. 그들이야말로 박해를 견디며 하루하루 희생하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작품 속에서만큼 극단적인 앎과 집단 자살의 상황은 아닐지라도,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이성을 추구하고 그 믿음 속에서 살아남고 있는 중인 사람들이다. 그 속에서 어떤 것을 믿고 어떤 희생을 치를지, 또 어떻게 살게 될지 인물들 만큼이나 관객도 정답을 내릴 수 없다. 아마 빈 공간에 어떠한 요소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것에는 주체적인 생각을 관객의 몫으로 남기기 위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인물들은 의문을 해결하지 않은 채로 극장 퇴장로를 통해 나간다. 관객들 역시 배우들이 나간 길을 똑같이 밟아나가며, 작품을 마주한 이후 극장 밖으로 나가면 삶이 있을지, 죽음이 있을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그 사회를 구성해나가며 ‘살게’ 될지, 그 고민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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