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공작소 마방진 연극 <회란기> 리뷰
지난 3월 5일부터 20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 극공작소 마방진의 <회란기>는 중국 원나라 때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프로덕션이 홍보물과 공연 자료 곳곳에 내걸고 있는 문구는 ‘700년째 계속되는 이야기’이다. 한 아이를 두고 자신이 친모임을 주장하는 두 여인과, ‘모성’을 이용한 지혜로운 방식으로 판결을 내리는 현명한 재판관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익숙할 것이다. 이야기의 원형이 가진 친숙함과 더불어, 그만큼 작품이 담은 이야기가 지금까지 오래토록 유효하다는 것을 강조한 듯싶다. 물론 지금도 물질적 욕망에 눈이 멀어 도덕성을 저버리는 권력자들과, 그로 인해 희생당하는 정의와 진실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권력의 부패’와 ‘진실은 승리한다’는 큼지막하고 당연한 주제의식만으로는 작품이 2022년 현재에 통할 수 있을지 조금은 의문이 든다. 그 의문이 온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을 넘어서는 요소로서 작용한 프로덕션의 시도 중 하나는, 무대 위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모습과 더불어,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를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과 연관 지어 강조하려 했다는 점이라 생각한다.
거리두기와 거리 좁히기의 조화
작품은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 것이 연극임을 일깨워 준다. 극 시작 전, 배우들이 극 중 인물을 때리는 장면에서 사용되는 소품이 실제로는 전혀 신체적인 고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관객들에게 시범을 보여주는 것부터 그 형식적 약속은 시작된다. 또한 본격적인 작품 속 이야기는, 노파가 등장해 객석을 향해 자신의 딸 해당을 기생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에 대해 한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처럼 배우들은 처음부터 관객을 향해 자신의 속내를 표현하거나, 상황을 해설하듯 말을 건다. 그 말하기의 방식 또한 일상생활에서의 대화의 방식과는 다른, ‘말의 의미를 잘 전달하기 위해’ 극화된 방식으로, 배우들이 연극 속 인물을 연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요소는 인형과 이를 움직이는 사람의 노출이다. 앵무새와 어린아이의 역할의 경우 배우들이 인형을 움직이는 형태로 제시되며 대놓고 ‘연기하고 있음’을 밝힌다. 인물들의 등장 역시, 인물이 얼마나 현실 세계 속에 살아있느냐를 보여주는 것보다는, 이 인물이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를 유형화시켜 한눈에 파악하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듯하다. 예를 들어, 등장과 동시에 무대에 자리를 깔고 누워버리는 장림의 모습에서는 그의 게으름과 무능함을, 흥겹게 노래하고 춤을 추며 등장하는 마원외의 모습에서는 그의 부유함과 삶을 즐기는 듯한 모습이 드러난다. 이는 실제로 관객들의 웃음을 이끌어내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며, 결코 ‘자연스럽지’ 않게 인물의 전형성을 드러내면서 눈앞의 상황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예술’임을 강조한다.
앞서 언급한 요소들은 작품이 의도적으로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차단하고 거리를 두게끔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작품은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물에의 감정이입을 극대화시키는 요소들을 함께 활용하고 있다. 유형화된 인물의 제시는 인물의 상황과 정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복잡한 생각을 요하지 않게 함으로써 오히려 감정적인 동화를 더 효과적으로 이끌어내기도 한다. 또한 작품은 해당이 곤장을 맞는 고통스러운 모습과, 슬픔과 원통함을 호소하는 독백들을 감정을 쏟아내는 형태로 길게 제시한다. 더불어 해당이 죽은 이들과 만나는 다소 신파적인 장면을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 남편과 만나는 장면으로 두 번씩이나 제시한 것에서 작품이 정서를 온전히 차단하는 데에 목표가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오히려 작품은 인물의 정서를 따라가며 재판 장면에서의 답답함과 원통함,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끔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인물들이 생략된 말의 방식으로 해당이 겪어온 일을 고하는 장면, 포청천이 재판 과정에서 마원외의 행동을 상상해보는 장면 등은 무거운 정서의 흐름 속에 갑작스럽게 웃음을 유발하며 관객들이 잠시 몰입에서 빠져나와 연극을 보고 있음을 인지하게 한다.
이처럼 거리두기와 거리 좁히기를 교차하며 진행되는 작품은 인물의 상황을 마음으로 느끼게 하면서도, 거리두기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을 ‘보는 이’로써의 자기 자신을 인지하도록 하고, 현재 무대 위 사건을 ‘보고 있다’는 감각을 잃지 않도록 한다고 생각한다.
관객이라는 대중의 시선
장해당과 마부인의 첫 재판부터 마지막 재판까지 극이 진행되는 내내, 무대의 위쪽에는 커다란 거울이 높이 매달려 있다. 거울은 배우들의 모든 행적을 비춘다. 하지만 객석에서 그 거울을 마주하면, 관객이 앉은 위치와 각도에 따라 무대 위 상황의 일부만이 보인다. 거울에 비치는 상은 작품 속의 상황과 다양하게 맞물린다. 이는 마부인과 조영사가 증인을 매수하고 자신에게 유리할 수 있도록 상황을 ‘프레이밍’하며 대중에게 사건을 조작해서 보여주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하지만, 관객이 보는 무대 위에는 실제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 전부와, 모든 사건의 전말, 그리고 치우쳐진 거울의 상이 함께 제시된다. 즉, 관객에게는 시선을 조금 더 낮춰 모든 사건의 전말을 볼 것인지, 시선을 조금 더 높여 극 중에서의 주된 사회의 시선과 같은 거울 속의 조작되고 치우친 상을 볼 것인지, 그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자유는 극장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 연극이며, 관객은 무대 위 사건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작품의 진행 방식과 맞물린다. 이는 해당이 고통 받고 억울함을 푸는 전체 과정에서 사건 속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무대 위 인물들만큼이나, 관객의 ‘봄’이라는 요소도 은유적으로 포함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작품에서는 많은 것들이 배우들의 자의적인 ‘명명’으로 이루어진다. 사실적인 무대 세트는 등장하지 않고,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빈 무대에서, 배우들이 춥다고 말하거나, 미끄러운 듯한 걸음걸이를 보여주면 그곳은 겨울날의 빙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에서는 상황이 배우라는 자의적인 매체를 거쳐 전달되고, 관객이 이를 사실로 보겠다는 연극적 약속을 받아들임으로써 형성된다는 점이 강화된다. 이러한 극의 전개 방식 또한 관객이 특정 시각을 받아들여 ‘봄’이라는 요소가 사건의 진행에 중요함을 일깨워준다.
극중에는 이미 죽은 인물들이, 부당한 일을 겪는 해당에게 ‘너의 편이 되어 지켜보고 있겠다’는 표현을 쓰며 자주 등장한다. 거울의 위치가 그러한 초월적인 존재의 시선과 연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울이 달린 위치에서 내려다보면, 극 중 인물들의 행보가 치우치지 않게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배우나 관객의 위치에서 거울을 올려다본들,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만이 보일 것이다. 저 위에 누군가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들은 사람들의 일그러짐을 모두 볼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들은 지상의 인간들이 가진 좁은 시선으로는 보지 못했거나,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않으려 했던 모습까지도 저 위에서 휠씬 더 넓게 포섭하며 모두의 잘잘못을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거울의 존재는 무대 위 인물들이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결국은 정의의 승리를 맞이하는 데에 어떠한 ‘순리’가 작용한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와 닿게 하며 정의로운 시각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거울은 극의 마지막 부분에 관객석을 향한다. 이는 관객 자신이 러닝타임 동안 작품을 보아왔던 방식들과, 앞으로 어떤 사건들을 보는 방식을 속일 수 없는 절대적인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주며 자신의 ‘봄’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든다. 또한, 무대 위 인물들처럼 관객 자신의 모습도 어쩌면 특정 시각 아래 일부만이 왜곡되어 보일 수 있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이 판단될 수 있다는 인식을 제공하며, 왜곡된 시선을 받아들여 보는 것이 관객 자신에게까지 닿을 수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석회 원을 그릴 줄 아는 태도
작품의 제목은 <회란기 (灰闌記)>이다. 灰闌은 석회로 가로막다, 석회로 경계를 만든다는 뜻이다. 즉 작품의 제목은 석회로 그은 경계의 이야기, 석회 원 이야기가 되겠다. 작품의 공식적인 영어 제목에서도 의미가 크게 변하지 않는다. ‘The Chalk Circle’, 석회로 그은 원을 뜻한다. 작품을 보면서 왜 제목이 ‘진실 된 여인’, ‘지혜로운 재판관’, ‘진실 또는 선의 승리’ 등이 아니라, 하필이면 ‘석회 원’의 이야기인지 궁금해졌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원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아이를 잡아당기는 이미지를 통해 도덕성을 넘어선 강렬한 욕망과 선, 사랑의 대비를 한 번에 이끌어낼 수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석회 원을 긋는 행위’를 강조하면서, 도덕성을 저버린 세상의 주된 시선에 매몰되지 않고 공정한 기준을 주체적으로 세워 세상을 보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는 생각이 든다. 포청천은 권력과 돈이라는 요소가 얽혀 형성된, 장해당을 죄인으로 보는 세상의 주된 시선을 무작정 따르지 않는다. 그는 진정한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새로운 시선과 기준을 확립한다. 그것이 석회 원을 그리는 행위로 강조되는 것이다. 이는 관객의 ‘보고 있다’는 인지, 거울의 은유와 이어져 사건을 ‘보는’ 이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여러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사건을 보는 ‘대중’이라는 요소가 쉽게 생성되고, 그들이 사건을 끌고나가는 데에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오늘날의 사회상과 맞물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석회 원은 자의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도 한 회차가 끝나면 사라졌다가 다시 그어지듯이, 그 원은 언제, 어느 장소에, 어떤 모양으로도 그려질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서 원은 아주 자그마한 것이다. 그 눈앞의 작은 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시켜 세상을 판단했다고 해도, 원 밖에는 무한하게 큰 세상이 있고, 누군가는 더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서 그 왜곡과 잘못을 알 것이다. 극공작소 마방진이 선보인 오늘날의 <회란기>는, 권선징악의 교훈을 사건을 보는 대중의 시선에 더욱 확대시켰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