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그린피그의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가 지난 3월 26일부터 4월 3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10년 만에 재공연되었다. 작품은 익숙한 동화 ‘원숭이 꽃신’과,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바탕으로 현세대 문명화의 이면을 다루고 있다. 보는 이가 이해하기 편리하도록 잘 계산되고 정돈된 연극의 서사는, ‘원숭이 꽃신’에 드러나는, 걷기 편리하도록 자연에서 신발을 만들어내 신는 행위와 맞닿을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작품은 안락하고 안전한 형식을 깨부수고, 은유적인 대사들과 파편적으로 삽입된 장면들을 통해 난해한 연극 경험을 만들어낸다. 작품은 도입부부터 서로의 관계를 알 수 없는 세 사람의 주장만을 던져놓는다. ‘인간 존엄성 상실의 슬픔’, ‘기성세대의 사상을 답습하는 것의 필연성’, ‘태어나기를 거부하는 태아’에 대한 주장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원숭이 꽃신 이야기의 원숭이가 인간세계로 내려와 인간세상의 이야기를 이어가듯, 이야기를 서술하는 듯 한 형식이 점점 실제 인물들의 대화로 바뀌어가듯, ‘수수께끼’ 같이 해체된 이야기들은 서로 관계성을 찾아간다. 그 과정 속에 무대 위 익숙한 ‘타인의 이야기’가 자신의 일상으로 침투하게 되면서, 관객은 일종의 공포와 불편함을 느끼며 ‘일상’이라는 말에 파묻힌 문제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연극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포스터
익숙함과 낯섦을 넘나드는 우화적 발상
작품은 각각 원숭이와 오소리의 탈을 쓴 배우들을 통해 ‘원숭이 꽃신’이야기를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느끼는 어색함 또는 불편함이란 무대 위 인물들이 이야기 속에서 동물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신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데에서 발생할 것이다. 또한, 이는 어쩌면 인간의 오만에서 올지도 모른다. ‘다른 존재들과 다르게 직립보행 할 줄 아는’ 인간존재가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동물을 연기함으로써 무언가 격하되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오소리에게 지배당한 원숭이는 더 나아가 다시 ‘인간’을 지배한다. 또한, 문명화의 상징, ‘신발’을 통해 권력을 잡은 오소리만이 가면을 벗고 인간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인간성’은 문명을 통해 다른 존재들을 지배할 수 있을 때 획득하는 것 같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 건설 시에 오히려 권력의 아래층에 위치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다. 이러한 구분의 전복이 주는 불편함은 인간을 진정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만든다.
인간과 다른 자연 사이의 위계가 무너짐에서 오는 불안과 더불어, 작품은 기성세대의 지배권력 역시도 흔들어놓는다. 우화의 성격 속으로 들어왔을 때 가장 불편해지는 것은 어쩌면 '태아'이다. 무대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로서의 태아가, 동그란 원 속에 들어가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태아가 살아 움직인다는 것은 어색하다. 하지만 그 이유를 찾자면 원숭이나 오소리처럼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 행세를 해서'나, 사물처럼 '살아있지 않은 것이 살아있는 척 해서'라고 볼 수가 없다. 그것이 우리가 미래 세대를 느끼는 방식일 것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기에 '인간이 아닌 것',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 분류하고 싶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와 같은 생명을 가지고 오는 존재다. 그들은 기성세대가 제대로 신경을 쓰고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의 병을 이어받아 태어나기 전부터 병에 걸린 상태이다. 작품은 이들의 발화를 소리지르는 듯하게 의도하여 불편함을 극대화시키고, 우리에게 책임을 묻고, 우리의 자리를 대체하게 될 존재들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거기에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머니와 ‘계약'을 해야 한다는 설정을 더해 미래 세대에 대한 권력자의 위치에 있을 것 같은 ’기성세대'의 지위를 확실히 위기에 빠뜨린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극중 사람들이 겪는 파멸의 과정을 통해 그 지위를 지켜나가려는 일이 옳은지를 묻는다.
작품은 부은 발을 가진 오이디푸스를, 신발을 너무 오래 신어 오히려 발이 부은 인간의 모습과 연관 짓는다. 나무가 이성을 상징하는 ‘빛’을 전부 가려버린다는 이미지와, 생각을 이끌어내는 신체부위인 ‘머리’가 없는 돼지, 빛나는 태양 대신에 빛나는 물고기들의 이미지를 대사를 통해 제시하면서 작품은 인간이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가지는 오만을 감각적으로 깨닫게 한다. 꽃신을 만들어내고, 원자력 발전소를 문명은 행위는 이성적으로 계산하여 형성되었고, 이를 토대로 발달하고, 이해관계를 형성하며 권력을 만들어냈다. 덕분에 편리함을 불러일으켰던 일이, 오히려 고통을 주는 것이다. 무대 위 원숭이나, 마을 사람들의 선택을 볼 때, 관객들은 그들의 파멸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들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으나, 그들 자신만이 모르는 듯한 느낌이다. 관객이 무대 위 이야기를 주체적으로 재구성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동안, 어쩌면 자기 자신도 그들과 같은 운명으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지는 않은지 하는 공포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오이디푸스에게 주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신탁은 항상 수수께끼 같다.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 원래 주어진 신탁과 끼워 맞춰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어떤 운명을 향해 가고 있는지에 대해 무지하다. 작품은 고대 그리스부터 내려와, 다양하게 변형되어 온 이야기를 수수께끼와 같은 신탁처럼 제시한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정말 극중에서처럼 파멸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들을 자신의 삶에 끼워 맞춰보도록 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무대 위 등장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폐품 속의 사람들의 이미지는 종말과 파멸을 피부로 와 닿게 한다. 관객은 한낱 연극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인간은 이성적이기에, 탈을 벗을 수 없는 배우처럼 연극을 멈춰버리거나 중간에 나가지 않으며 그 경고를 주의 깊게 듣는다.
살해당할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부친을 살해한 것에 대한 벌을 받았다. 연극의 시작부분에는, 자신을 억압하는 인물을 이상화하고 동일시하는 아이의 행동양상과, 부모를 답습하지 않는 아이를 벌하고자 하는 기성세대의 입장이 제시된다. 프로이트는 ‘가정'을 ‘문명화’가 이루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정 내에서 기존 사회의 질서를 아이가 이어가도록 하는 존재였다. 극 중에서 태어나야 하는지를 논하는 태아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지만 끝끝내 무대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영향으로 다음 세대를 잇게 된 어머니만이 존재한다. 어머니는 태아의, ’당신이 나보다 일찍 죽을 수 있다‘는 말에 ’그럴 일은 없다'며 반감을 표한다. 그리고 설령 자신이 먼저 죽더라도 태아들이 스스로 신발가게를 찾아 신발을 사 신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성세대가 일구어낸 문명화의 논리를 답습하여, 자율성과 정체성을 잃는 양상을 태아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태아에게 세상을 정당화시키고,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에는 자유가 없지만, ‘살아가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설득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유라도 믿고 보여주는 것은 신발을 벗는 것이 아니라, 방독면을 벗는 것이다. 즉 문명 속에서 ‘자유인 척’ 하는 제한된 자유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태아들이 말하는 오이디푸스와의 대비가 이루어진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살해했고, 신발을 벗었고, 그렇기에 죽음에서 자신을 지킬 가장 강력한 방독면을 가진 채로 청정지역을 찾아 헤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태아가 원하는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살해할 ‘하나의 중심점'으로서의 아버지는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즉, 이제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채로 영향을 받아 재생산하는 인물들이 만연한 세상에서, 세상을 한 번에 바꿀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연극을 본 관객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문제 상황을 알게 되었지만, 연극이 정답을 제시하지는 못했기에 어디서 무엇을 고쳐야할지는 모른다. 극 중 다음 세대는 태어나지 않기를 선택하지만, 결국 그렇다고 기성세대가 영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어머니의 죽음에서 드러난다. 태아들은 쓰러진 어머니를 향해 공격적인 발길질로 천 조각을 떠밀어댄다. 그렇게 어머니의 죽음의 모습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산물인 천 조각에 파묻힌 형태이다. 다음 세대의 가능성까지 앗아간 온전한 파멸인 것이다. 이렇게 작품은 해결책을 찾지 못한 이야기를 제시하지만, 덕분에 작품을 빠져나온 관객은 해결책을 찾으려고 고민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게 된다.
극 중 태아들이 이야기하듯이, 콜럼버스의 달걀과 오이디푸스의 수수께끼는 공통점을 갖는다. 콜럼버스가 달걀을 세운 것은 일단 시도한 다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달걀은 바로 설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달걀 자신은 부서졌다. 수수께끼 속의 점심, 즉 자신의 가장 한창 때에 두 발로 ‘바로 설’ 수 있는 인간, 인간은 신발을 신었기에 개울과 단단한 바위 위에서도 편하게 바로 설 수 있었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에 남은 사람들처럼 그 자신은 파괴당했다. 신발은 일단 신다 보면 ‘아무것도 아니’ 다. 신기할 것도 없이 일상적으로 익숙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것을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커튼콜을 생략하여 작품의 형식적인 종결이 없듯, 오이디푸스가 끊임없이 맨발로 청정지역을 찾아다니듯 이야기는 종결되지 않았다. 극장 밖으로 빠져나온 관객들의 세상도 종결되지 않았기에, 그 다음 이야기는 관객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