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십 년 동안 같은 꿈을 꾸었다. 낡은 패물함을 품에 안고,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는 꿈. 늘 같은 장소, 같은 공포감. 하지만 늘 달라지는 건 하나, 내 감정의 농도였다.
그 꿈이 유독 선명하게 다가온 시기가 있었다. 바로 코로나19가 시작되던 때, 나는 상하이에 있었고, 남편은 싱가포르에 있었다.
그해 겨울, 상하이의 공기는 무거웠다. 싸스 사태도 겪었던 나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달랐다. 두려움은 빠르게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고, 사람들은 집을 요새처럼 잠갔다. 학교 수업은 온라인으로 전환됐고, 택배는 아파트 수위실옆 아빠드동 에서 100미터 넘는 거리까지밖에 배달되지 않았다. 생수, 우유, 채소를 그 거리에서 끌고 오는 일이 반복되었고, 지금도 오른팔은 그 후유증으로 자유롭지 않다.
남편은 설 연휴에 싱가포르에서 상하이로 들어왔다. 당시 중국에선 마스크를 구하기 어려웠기에, 남편은 의료용 3M 마스크 10박스를 가져왔다. 그 마스크는 나중에 내가 상하이를 떠날 때 의료진에게 기증했다. 작은 연대감이었지만, 그 시기엔 절실했던 위로였다.
사실 우리는 가족이 함께 싱가포르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항공편 취소로 모든 일정이 어그러졌고, 남편은 말레이시아를 경유해 혼자 먼저 들어갔다. 나는 심상치 않은 공기를 감지하며, 결국 이삿짐을 따로 보내고 나 혼자 뒤따르기로 결정했다. 그 판단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지금 돌아보면 스스로도 놀랄 정도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싱가포르에서 네 식구가 함께 살게 되었다. 하지만 상하이 국제학교와 싱가포르 로컬 학교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는 나의 교육 철학 아래, 아이들의 수학 실력은 외국인 학교 기준에 익숙해 있었다. 갑작스러운 교육 환경 변화는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작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경험은 내게 많은 것을 남겼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결국 삶은 흘러가고, 선택은 책임으로 이어진다는 것. 그리고 오래도록 반복되던 그 꿈은, 아마도 나의 무의식이 전하는 메시지였는지도 모른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고 도망쳤던 ‘패물함’은 사실, 내 삶 그 자체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