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만남

by 지로 Giro


엊그제, 나는 방과후 학원에서 돌아오는 작은아이를 마중하러 나갔다. 아이에게 가장 큰 기쁨은, 엄마가 사주는 따뜻한 밥 한 끼였다. 그날은 내가 조금 일찍 도착해서, 근처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다. 지난번 맥리치 하이킹에서 안경을 잃어버린 뒤 새로 맞춘 안경은 여전히 어색했고, 주변 풍경이 낯설게만 다가왔다.


앞 테이블에 앉은 남녀가 다소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커피를 홀짝이던 중, 그 여성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런 우연이!” 우리 둘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그녀는 바로, 재벌가의 전 사모였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혹적인 분위기와 광채를 머금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반가운 마음에 내 자리로 와 한참을 수다 떨었다. 나는 조만간 다시 얼굴을 보기로 약속하고 자리를 떴다.


싱가포르에서 살다 보면 이런 만남이 가끔 생긴다. 나 역시 여러 재벌가나 그 형제들과 인연이 닿았지만, 그들 사이에선 유독 선이 분명해 보였다. 형제라고 해도 사업적으로 얽히지 않으려는 거리감, 혹은 서로의 삶에 지나치게 관여하지 않으려는 절제가 느껴졌다.

한 번은 남편의 지인이 “내가 누구누구 그룹의 형인데, 이 얘긴 밖에선 하지 말아줘”라고 당부한 적도 있다. 아마 동생 쪽에서 가족을 단속한 모양이다. 밖에서 자기 이름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 그건 거리감이자 품위 있는 자제이기도 하다.


나는 그날의 우연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삶이란 우연한 장면 속에서 반짝이는 인연을 마주하고, 또 그것을 조용히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지나친 자랑도, 관계에의 욕심도 없이.

오랜만에 마주친 그녀처럼,

빛나지만 조용하게,

자리를 지키는 존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