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기면, 나의 삶이 펼쳐진다 — 『위대한 유산』

by 지로 Giro


스물세번 넘게 읽은 책이 있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나는 이 책 속에서 내가 살아낸 삶의 조각들을 보았다.

누군가는 한 번의 독서로도 족하다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 책을 살아냈다.


처음 읽었을 때, 피프는 그저 소설 속 인물이었다.

고아, 미지의 후원자, 계급과 사랑 사이의 방황.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내가 어른이 되어갈수록

피프는 내 안에서 숨 쉬기 시작했다.

그의 열망, 수치심, 사랑과 오해,

그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


영어 원문으로 읽을 땐,

문장과 문장 사이의 침묵이 나를 붙들었다.

디킨스는 고통을 말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고통을 기다림으로, 공백으로,

숨죽인 문장들로 빚어냈다.

그 정적이, 어쩐지 내 마음 같았다.

말하지 못했던 슬픔, 설명할 수 없었던 외로움,

그 무명의 감정들이 조용히 나를 끌어안았다.


한국어판은 또 달랐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피프의 고백이 내 속을 쓸어내렸고,

어떤 문장에서는 어릴 적 나를 껴안는 듯한 위로가 느껴졌다.

익숙한 말로 옮겨진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낯선 자신을 발견했다.

어릴 적 나, 부모의 시선을 갈망하던 나,

사랑받고 싶었으나 늘 부족했던 나.

그 모든 나에게 이 책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넌 잘 살아낸 거야. 그걸로 충분해.”


『위대한 유산』은 내게 질문을 던졌다.

너는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피프처럼 흔들리며 살다가, 결국 사랑 앞에 무릎 꿇게 될 때

너는 무엇을 유산으로 삼을 것인가.


나는 안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이 책 한 권이

내가 지나온 시간의 증인이라는 것을.

몇 번이고 다시 펼쳤고,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살아났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나는 이 책 속에서,

내 상처의 이름을 찾았고,

내 삶의 서사를 회복했다.


이제 『위대한 유산』은 내게 책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장소다.

내가 매번 무너질 때마다 돌아가는,

기억과 용서와 성장의 장소.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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