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사람이 사람을 상처내는 이유는
힘 때문이 아니라,
말을 잃은 쪽의 고요 때문이라는 것을.
고요는 처음엔 작은 연못 같았다.
손바닥으로 건드리면
물결 하나도 피지 않을 것 같은 투명함.
누군가는 그 평온을 예의라 말했고,
누군가는 순함이라 불렀다.
나는 오래도록 그 말들을 믿으며
내 연못을 더 깊고 조용한 곳에 숨겨두었다.
하지만 세상은 고요를 정물처럼 바라보지 않는다.
누군가는 연못의 가장자리에 발을 디디고,
누군가는 조심성 없이 돌을 던지며
그 잔잔함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오해한다.
가해는 그렇게 시작된다.
악은 힘줄에서 자라지 않고,
용서하는 자의 침묵에서 뿌리내린다.
나는 수없이 뒤로 물러섰고,
나는 수없이 이해하려 했고,
나는 수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연못의 물은 조금씩 식어갔다.
한때 빛을 품던 수면은
이윽고 돌조각들이 침잠하는 어둠으로 변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 새벽,
내 안쪽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
얼음 밑에 갇혀 있던 이름 없는 숨,
그것이 조용히 말의 형태를 빚었다.
“그만.”
그 한 음절은 칼이 아니었고,
전쟁의 깃발도 아니었다.
그저 언어를 잃은 내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물속에서 오래 묵혀 있던 빛을 흔들어
내 연못을 서서히 다시 데우기 시작했다.
그때 비로소,
연못 가장자리에 서 있던 그림자들이 멈췄다.
내 침묵 위를 마음대로 걸어다니던 발자국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허공에 머물렀다.
말 한마디가,
세계의 형체를 바꾸는 순간이었다.
침묵은 약함이 아니었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상처가
숨을 고르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그 시간을 지나고 나면,
마침내 말은 뿌리를 갖는다.
그리고 뿌리를 가진 말은
어떤 발자국도 쉽게 짓밟지 못한다.
오늘부터 또 2025년도 한 해의 마지막 달이 열린다.
나는 그 문턱 위에 작은 언어 하나를 놓는다.
나를 지키는 소리.
나를 비추는 소리.
이제는 빼앗기지 않을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