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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리 Oct 27. 2022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지겨워졌다

‘마음일기'에서'독서일기'로의 환승기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지겨워졌다. 불편한 상황과 감정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라는 메시지로 마무리되는 루틴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자잘한 일상, 불편한 관계들, 불확실한 미래에서 비롯된 불안과 공허하게 반복되는 다짐들이 못 견디게 가벼워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쓰고 싶은데, 정처 없이 쓰다가 어느 순간 펜과 내가 하나 되어 내달리는 순간을, 그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느끼고 싶은데, 정작 쓰고 싶은 이야기가 사라졌다. 나에 대해 쓰지 않으면, 이젠 무엇에 대해 써야 하나.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갈망으로 조급해질수록, 어떤 이야기도 시작할 수 없었다.


일기 쓰기를 애정 하는 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 시작한 것은 스물다섯, 취업 준비에 한창일 때부터였다. 당시 나는 자기소개서 공장 하나를 가동하고 있었다. 표준 자기소개서 하나를 작성한 뒤 지원 회사 특색에 맞춰 이리저리 변형하고 짜깁는 일을 한 자리에서 몇 시간씩 기계처럼 반복했다. 자소서의 큰 틀은 유지하되, 지원 회사의 철학과 특색이 드러나도록 일부 단어나 문장, 사례를 끼워 맞췄다. 그러다 보면 내가 자소서를 '만드는' 건지, 자소서가 나를 '만드는' 건지 모를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이 또한 취업 준비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자소서 ‘제조’가 어찌나 지겹던지 평소 기피 순위 1, 2위를 다투던 '집안 청소'에 마음이 갔다. 하기 싫은 일은 상대적이기 마련이다. 지겨움에 있어 자소서 작업은 집안 청소보다 한 수 위였다. 복장을 갖추고 서랍장 구석구석에 박혀 있던 상자까지 꺼내어 안에 담긴 물건들을 쏟아서는 차곡차곡 가지런히 담았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때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작은 자물쇠가 달린 핑크색 노트였는데, 열쇠를 자물쇠 옆에 달아놓을 정도로 관리가 허술했다. 가뿐히 자물쇠를 열어 일기를 한 편씩 읽어보았다. 일기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몇 편 되지 않았는데, 그마저도 상투적인 문장들–온 마음을 다해 바라면 우주가 들어줄 거라는 이야기 따위–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10대 시절의 마음 한 귀퉁이에 접속한 듯한 느낌이 주는 위안이 있었다. 거기 그렇게 내가 있었구나. 미래의 나에게 지금의 나도, 여기 이렇게 있겠지.


그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매일 쓸 때도, 일주일에 한 번 쓸 때도 있었다. 10년을 훌쩍 넘긴 근래에는 한 달에 한 번 쓰기도 한다. 일기장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중철 제본된 줄노트를 골랐다. 어딜 가든 부담 없이 지닐 만한 부피와 무게가 필수조건이었다. 외출할 때면 언제나 가방에 일기장과 펜을 지니고 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공간을 발견하거나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가득 차면 터를 잡고 앉아 써내려갔다. (한 번은 북악산에 올라 청와대를 내려다보면서 쓰다가 검문을 받기도 했다.) 어쩌다 일기장을 집에 두고 나온 날이면 하루 종일 불안을 데리고 다녔다.


쓰는 시간만큼은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일기에도 거짓이 스며드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주변 사람들이 불온하다고 여길 법한 생각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최소한의 검열로 파고들면서 느끼는 희열이 있었다. (물론 일기 속 이야기가 물질의 형태로 존재하는 데서 비롯되는 불안감도 있었는데, 가끔 일기장이 가족과 지인들에게 공개되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쓰고 있는 내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동기들에 비해 취업 시기도 늦고, 소속된 조직도 없고, 마음을 나눌 사람도 마땅치 않던 터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카페나 공원에 홀로 앉아 있을 때 불현듯 외로워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펜을 잡고 일기를 쓰면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일기를 쓰고 몇 년 간은 쓸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힘들고 괴로운 순간은 매주 성실히 찾아왔고, 그때마다 일기장에 두서없이, 결말에 대한 기약 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다 보면 반짝반짝 빛나는 한 줄이 남았다. 그러면 나는 폰으로 시간을 분 단위까지 확인해서 글을 쓴 장소와 함께 기록하고, 서명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나면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나온 듯 개운해졌다. 그러나 직장을 구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0여 년이 지나자 점차 쓸거리가 곤궁해졌다. 물론 쓸만한 소재는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상황만 조금 달라졌을 뿐, 이 문제를 풀어나갈 레퍼토리는 그대로였다. 마치 자소서를 짜깁기할 때처럼!


언제 가장 괴로움을 느끼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를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 자체인 것 같지는 않다고, 오히려 아무런 자극도 없어서, 더 이상 무언가를 끄적일 힘조차 내지 못할 때인 것 같다고 답했다. 그 순간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한 달 넘게 아무 글도 쓰지 못하는 때가 많아졌다. 어렵사리 쓸 기회를 마련했을 때조차 힘없는 손으로 몇 문장을 휘갈겨쓰다가는, 팔만 아프고 말겠다 싶어서 그대로 접기 일쑤였다. 여기저기 올라온, 자기 마음을 세심히 돌보는 글들도 시시하게 느껴졌다. 당시 접했던 다수의 글들이 타인을, 상황을, 세상을 탓하면서 자신을 다독였다. 특히, 유년기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직장상사의 비매너로 인한 울분,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향한 분통 내지 쿨한 저항 등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야기는 제각각이지만 이에 대처하는 태도와 스킬은 하나로 귀결됐다. 자기 위안, 즉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자기는 존재 자체로 소중하며 그러한 믿음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조언으로.


내가 써온 일기도 맥을 같이 했다. 결국은 온 마음을 다하면 우주가 들어준다던 동화 같은 이야기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뻔한 결말을 예상할수록 쓸 힘을 잃어갔고, 쓰기를 그만둘수록 삶은 시시해졌다. 써야 하는데 못 쓰고 있다는 인식이 나를 더욱 하찮게 (하찮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쓰지 않음이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이것이 더욱 격렬히 쓰지 않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이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떠올린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일에 매몰되는 것이었다. 일에 몰두하는 행위는 넷플릭스 시청보다 유익하고, 배움 활동보다는 덜 수고로웠다.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묻어둔 채 일상도, 관계도 일로 가득 채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떴는데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출근하려면 침대 밖으로 나와야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온몸이 해파리가 되어 육지 위에 널브러진 것 같았다. 출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 큰 불안감이 덮쳤다. 결국은 목놓아 울면서 온몸으로 기어서 침대 밖으로 나왔다. 흔히 말하는 '번아웃 증후군'이구나 싶었다. 전에도 정도는 덜했지만 비슷한 일이 간혹 있었는데,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쓰는 힘’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어벤저스급의 슈퍼파워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을 지탱하는 ‘마지노선’이라 여겼던 구석이 있었는데, 이마저 사라진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 책은 긴 터널 안에 갇힌 듯했던 내가 터널을 뚫고 출구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끝없는 어둠을 뚫고 다음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도록 랜턴의 빛줄기가 되어준 것이 바로 ‘책’이었다. 그 전에도 내 곁에는 항상 책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책과 교감하는 방식이 달랐다. 책에서 읽은 내용을 조직적이고 세세하게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대목들에 주목했다. 한 권을 다 읽고 난 뒤에는 낱개로 흩어진 단상들을 그러모아 독서일기를 썼다. 독자를 상정하여 잘 정돈된 글을 쓰기보다는, 쓰는 시간과 분량에 제한을 두지 않고 내 생각을 느리지만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렇게 책 속 이야기와 나의 경험으로 직조된 면 조각들을 연결해가다 보면 글의 마지막 문장이 남았는데, 책이 나에게 은밀히 건네는 쪽지 같았다.


책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한 권을 긴 호흡으로 읽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한지를. 하루에도 수백 권의 책과 그 이상의 텍스트 기반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고, 오늘 읽고 싶은 책이 내일은 다른 책으로 치환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 권을 느린 호흡으로 정성껏 읽어내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느리게 읽고 느리게 쓰는 행위를 수개월간 지속하는 데에는 이 행위를 함께 하는 작은 공동체의 힘이 컸다. 운 좋게도 나의 고민을 확장할 수 있는 인문학 책들을 다루는 독서클럽을 발견하여 함께 하게 된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이 있고, 모임 이틀 전까지 책을 읽고 일정 분량의 독후감을 올려야 참여가 허락됐다. 한 시즌에 4회 진행으로 참가비용이 적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기한 내에 독후감을 올리지 못하면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돈이 아까워서라도 책을 끝까지 읽고 독후감을 써내는 '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였다.


독서공동체의 일원으로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씨줄로 삶에서 겪은 이야기를 날줄로 엮어 쓰고 대화를 나누면서 내 안에 새로운 빛이 움트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자아 과몰입에서 벗어나 ‘우리’로, 우리를 둘러싼 ‘세상’으로, 시공간을 뛰어넘는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되었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이 작은 불씨가 되어 내 안에 조금 더 큰 불을 지폈고, 그 빛과 온기의 힘으로 어둠 속에서도 조심스레 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딛는 방향이 출구와 직결되리라는 확신까지는 필요 없었다. 출구의 유무도 필요하지 않았다. 발을 내딛는 행위 자체에서 설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나마 빛의 형상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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