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 여행하는 법(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을 읽고
결국 '내 방 여행하는 법'은 세상에 제대로 발을 내딛는 법이지 않을까. 생각하기에 따라 ‘방’이란 공간은 구속이 될 수도, 해방이 될 수도 있다. 방 밖의 세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시선과 마음과 영혼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지금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을 수도, 무한의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다.
『내 방 여행하는 법』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저자와 묘한 연대감 같은 게 느껴졌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기는 이라면, 즐길 줄 아는 이라면, 자신이 하고 있던 행위들에 ‘여행’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못했을지라도 자기 나름대로 검증되고 단련된, 그래서 누구에게든 자부할 만한 내 방 여행법이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이는 그저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 화면에 온 정신을 쏟는 것도, 해가 중천을 향하도록 침대에서 잠을 청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는 자기 방에 머물지언정, 방 안에서의 시간을 음미할 수는 없다. 저자의 글을 통해 내 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바로 애착을 가진 소품들, 육체(동물성)와 영혼의 분리, 그리고 ‘상상으로 누리는 즐거움’이었다.
코로나 상황으로 집에서 보내는 (보내야만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방법들이 다양하게 등장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정주행처럼 미디어의 힘을 빌리기도 하고, 홈카페나 홈트레이닝 등을 통해 외부 활동을 집안으로 들이기도 했으며, 온라인을 통한 공연, 모임 등으로 관계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행위들은 기존에 시도한 적 없거나 집 밖에서 하던 행위들을 집안으로 끌어왔다는 점에서 저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가 안내하는 내 방 여행법과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다. 만약 우리에게 인터넷이 없다면, 그래서 수시로 세상의 소식을 확인하거나 지인들과 소통할 수단이 차단된다면? 각종 미디어 상에 넘실대는 사진과 영상, 메시지들 없이 한 달 이상의 시간을 자신의 방에서 보내야 한다면? 결국 우리는 드메스트르처럼 우리의 육신이 놓인 공간과 최대한 교감하면서 기억과 상상을 최대한 동원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동물성(육체)’과 영혼을 분리함으로써 자신의 방을 우주 전체로 만들었다. 육체가 감각하는 것은 액자 몇 개, 소설과 시집 몇 권, 침대, 책상, 의자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가 이를 통해 주조해내는 세계는 매우 풍성하다. 알베르트와 로테를 담은 그림은 마음과 영혼을 나눌 수 있는 벗에 대한 생각으로, 전쟁에서 잃었던 소중한 벗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시 영원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진다. 자신이 소지한 그림과 판화들에 대한 소개는 저자가 걸작 중의 걸작으로 꼽은 ‘거울’에 대한 사색으로, 자기애라는 프리즘으로 자신을 왜곡해서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경계와 한계로 흘러간다. 특히 저명한 의사 시냐의 죽음 소식을 들은 뒤 시냐와 히포크라테스, 페리클레스, 아스파시아 사이에 이어지는 대화가 반려견 로진의 손길에 의해 현실로 돌아오는 부분은 압권이었다. 어릴 적 이후로 잊고 지냈던 상상하는 즐거움이 내 안에서도 되살아나는 듯했다. 종이인형 몇 개를 두고 홀로 몇 시간을 상상의 나래 속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처럼 집안에 새로운 물건을 들이지 않고도,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지 않고도, 익숙한 사물들 속에서 무한한 세계로 유영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자비에가 보여주는 여행법은 새로운 자극에 익숙한 현대인의 입장에서 낯설지만 깊은 영감을 준다.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자극적이고 중독성 높은 영상물에 무방비로 노출된 우리는, 인간의 가장 큰 즐거움일지 모를 ‘상상력’의 힘과 그 사용법을 점차 잊게 된 것은 아닐까. 화면 빼곡히 적힌 (심지어는 시청자의 웃음소리까지 유도하는) 자막들은 우리가 고민하고 생각할 여지를 빼앗는다. ‘퍼스널 브랜딩’이란 표현이 나올 정도로 우리는 매 순간 자신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줄 무언가를 찾아 시도하고 타인에게 입증해야 한다. 이처럼 방대한 정보가 빠른 속도로 유통되는 한가운데에 놓이면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거나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이 주는 즐거움과 그 가치를 (자의로든 타의로든) 홀대하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닥쳤던 ‘코로나 블루’는 상상의 즐거움을 놓친 채 외부의 자극에 과하게 의존했던 우리에게 가해진 의미심장한 경고였던 것은 아닐까.
가택연금에서 해방되며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나는 자유다. 아니 다시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일상의 멍에가 다시 나를 짓누를 것이다. 이제 나는 격식과 의무에 구애받지 않고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 이제 나는 내 자신을 이중적 존재로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나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상상으로 누리던 즐거움이 그리울 때면 나는 어떤 힘으로부터 위안을 받는 것을 느낀다. 그 은밀한 힘은 나를 인도한다. 그는 내게 속삭인다. 내겐 탁 트인 대지와 하늘이 필요하고 고독은 죽음과 같다고 말이다. 채비는 끝났다. 나의 문은 열렸다. 포 가의 널따란 회랑 밑을 거닌다. 수많은 정겨운 유령이 내 눈앞에서 오간다. 그래, 이건 저택이고, 문이고, 계단이다. 벌써부터 짜릿한 기분이 든다. 레몬을 자르기만 했을 뿐인데 이미 혀에서 신맛이 도는 것과 같다. (p. 184-185)
결국 '내 방 여행하는 법'은 세상에 제대로 발을 내딛는 법이지 않을까. 생각하기에 따라 ‘방’이란 공간은 구속이 될 수도, 해방이 될 수도 있다. 방 밖의 세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시선과 마음과 영혼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지금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을 수도, 무한의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다. 상상하는 즐거움을 품은 채 바라보고 경험하는 바깥세상은 어떨까. 생각만으로도 설렘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저자가 자택을 나서면서 느꼈던 짜릿함도 이와 비슷한 감정이었을까. 그 짜릿한 경험의 면면을 나만의 기록으로 남겨보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