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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리 Oct 25. 2022

자유화 이후의 자유주의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를 읽고

우리 사회는 다양성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을까. 우리는 아는 것들을 행동하기를 선택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에는 더더욱.



‘우리는 진심으로 우리가 아는 지식에 따라 행동하기를 원하는가.’ 올더스 헉슬리는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를 마무리하며 의미심장하게 묻는다. 개인의 자유의지가 국가를 위시한 '핵심 권력'에 의해 침해되고 박탈될 때, 개인은 이를 고발하고 거부하는 과정에서 겪게 될 고충을 감수할 것인가. 날 수 있는 능력은 없어도 당장의 부족함이 없었던 도도새의 날개가 퇴화한 것처럼, 현대인의 날개라 할 수 있는 ‘자유로울 권리’는 급변하는 사회 환경에서 명맥을 이어갈 것인가, 서서히 퇴화할 것인가.


저자가 대표작 『멋진 신세계』 발표 후 30여 년만에 다시 짚어본 '멋진 신세계'의 현실화는 그의 예상보다 빨랐다. 헉슬리는 인구 폭발로 인해 중앙으로 집중되는 권력과 그에 따른 과잉 조직화, 소수의 권력이 비대해진 집단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권력을 연명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선전, 상술, 세뇌 등)을 『멋진 신세계』 속 장면들을 예로 들면서 분석한다. 조지 오웰의 『1984』와 달리 헉슬리의 세계에서 집단 통제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잠재의식에 가하는 비이성적 가치 체계인 만큼, 그가 초점을 맞춘 요소들도 개인의 잠재의식을 지배하는 요소들이다. 저자는 다양한 개인의 정체성을 억압하는 집단 중심의 가치와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비판하면서, 집단이 갖는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인 특성이 독재 권력을 강화하고, 이에 과학과 사회과학(특히 심리학) 등의 학문이 이성적 토대를 제공하며, 강력해진 미디어의 영향이 대중의 세계 이해를 단순화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점들은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대중에 각인되었고, 권력과 매체가 대중에 가할 수 있는 무의식적 조작을 경계하는 태도를 개인의 내부에 심어 놓았다. 이제 우리는 선거 캠페인 문구를 보면서 각 정당에서 어떤 프레임을 활용하여 어떤 집단에 표심을 호소하는지, 기업들이 제품 및 서비스 광고에 심어놓은 사랑, 희망, 도전 등의 이미지에 어떤 상술이 담겨 있는지를 파악하게 되었고, 이에 비판이나 조롱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권력과 자본은 더 교묘한 수법을 활용하여 대중의 더 깊은 무의식에 침투하고자 하지만, 개인은 그들의 표어 뒤에 숨은 의도를 먼저 의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지식과 비판적 태도로 현대인은 더 자유로워졌을까.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를 이야기할 때 점차 획일화되는 문화와 행동 양식을 피하기 어렵다. 특히, SNS 등 개인 미디어 상에 수많은 다양성이 표출되는 반면, 대중에게 인식되는 것은 ‘어떠한’ 작용에 의해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은 일부 콘텐츠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으며, 한 번 관심이 집중된 메시지는 더 많은 트래픽을 유도하여 강력한 문화를 형성한다. 물론 미디어 상에는 전례 없이 다양한 콘텐츠들이 넘쳐 나지만 이 중 대중의 선택을 받는 것은 여전히 제한적이며, 그 안에 응축된 메시지는 과거보다 더 자본과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헉슬리가 제기한 질문을 재인용하자면, 우리는 '아는 지식에 따라 행동하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나의 탐욕이 타인에게 미칠 영향을 알지만, 당장 내가 얻게 될 이득과 손해를 계산해보고 이득이 클 경우 이를 취하는 데 따르는 도덕적 책임을 축소하려 한다. 이러한 현상은 매체를 통해 강화되는데, 이는 ‘돈이 최고다’라는 적나라한 메시지보다는 예능 속 유명 연예인의 호화로운 집과 그가 향유하는 문화 이미지와 결합되었을 때 영향력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요는, 내가 다양한 선전 수단과 세뇌 방법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시대가 된 것이다.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자유화 이후의 자유주의'가 필요하다.


헉슬리는 개인의 자유를 사수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교육을, 특히 올바른 언어 활용을 통한 이성적인 이해와 해석과 판단, 더 나아가 행동을 제시하지만, 그의 제안은 현실적으로 현대 사회에 큰 울림을 주지 못할 것 같다. 주된 교육의 형태가 '제도권 교육'에 머무르는 만큼, 교육의 목적과 방식은 사회 시스템의 유지를 간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에 적극 동원되기까지 한다. (최근 교육부를 향해 반도체 등 산업 인력 양성에 주력하라고 주문한 대통령의 언행은, 교육이 권력과 자본에 종속될 가능성이 농후하며, 특히 정권 교체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거시적인 방향을 잡지 못하며 더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헉슬리가 말하는 ‘교육’에 다시 한번 기대를 건다면, 이는 국가가 시행하는 의무 교육이 아니라, 시스템 밖에서 개인이 부단히 수행하는 배움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나는 책을 읽고 토론하는 사적인 모임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에게 익숙한 주제만 다루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낯선 주제에 대해, 낯선 사람들과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자신의 생각도 겸허하면서도 용감하게 나누는 것, 이를 통해 자신을 성숙시키는 것은 권력에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개인의 자유를 지켜내고 그러한 문화를 사회 전반에 전염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의 질서 유지도 중요한 만큼 의무 교육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의무 교육과 개인의 사적인 배움의 비율이 조정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배움 행위도 공적으로 인정해주는 시스템과 문화가 함께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오래전 신영복 선생님의 서화에서 본 ‘참된 자유는 자기의 이유를 갖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하지만 이 말을 실천하는 나는 많이 미숙했다. ‘자기’의 이유를 찾기 위해 기존에 갖고 있던 나의 신념에 부합하고 이를 강화할 수 있는 지식들을 허겁지겁 수집하는 데 주력했다. (페이스북으로 뉴스를 보기 시작한 습관을 두고, 내 입맛에 맞는 정보만 볼 수 있어서 좋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던 시절도 있었다. 물론 알고리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덜할 때였다.) 그렇게 분주히 움직이던 나는 항상 화가 나있었다. 알면 알수록 더욱 화가 났다. 헉슬리는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기껏해야 주변 환경이 용납하는 한에서만 진실하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우리가 고찰하고 고려하도록 타인들이 허락하는 제한된 진실과 불완전한 추리의 테두리 안에서 최선의 반응을 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나의 화의 근원을 다시금 직시하게 된다. 스스로를 제한된 환경 안에 가두고 불완전한 지식으로 불완전한 자유를 추구하고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느꼈던 극심한 허기가 참다못해 분노로 표출되었던 것 같다.


비슷한 현상을 나는 최근 대선과 그 이후 과정에서도 느꼈다. 특정 집단의 표심을 자극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다양한 혐오와 배제의 프레임을 과연 대중이 몰랐을까. 단순히 몰랐다고 하기에 우리는 너무 많은 심리학, 정치공학, 무엇보다 역사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이 속한 집단을 이롭게 해주리라는 헛된 기대에 부푼 채 이례적인 거대 양당 결집 양상이 지속되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 헉슬리는 집단은 이성적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집단 지성’이란 이름으로 집단의 이성이 새롭게 대두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특히 정치 이념으로) 크게 양분된 사회 분위기에서, 집단 안의 지성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단순한 프레이즈의 반복과 집착에 가까운 흥분과 열정, 인정과 번복을 모르는 대화법만이 가득하다. 그 사이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소수 정당과 사회단체, 이들이 대표하던 목소리들은 그 불씨마저 손 쓸 수 없이 약해졌다. 


우리 사회는 다양성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을까. 우리는 아는 것들을 행동하기를 선택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에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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