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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Future Writers

by 늘보리 Oct 24. 2022

다시 찾은 『자유론』에서 발견한 희망이 있다면,

『자유론(존 스튜어트 밀)』을 읽고

그럼에도 다시 찾은 『자유론』에서 얻은 희망이 있다면, 지지부진하고 자존심 상하기도 하고 아무한테도 인정받지도 못하는 이 투쟁의 과정이 ‘자유’의 관점에서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자유’는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듯했다. 중요한 가치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목소리를 낼 만큼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자유를 외칠 필요가 없을 만큼 온전히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최근 대통령 취임 연설에 수차례 등장한 ‘자유’는 여러 면에서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졌다. 연설 초반에는, 숨 쉬듯 자유를 만끽하는 (또는 만끽한다고 느끼는) 마당에 갑자기 웬 자유 타령이냐 싶었고, 후반부로 갈수록 수차례 이어지는 ‘자유’에 내포된 의미가 ‘자유시장경제’라는 납작한 의미임을 깨닫고는 불편함이 밀려왔다. 중요한 영역을 침범당한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을 받은 이유를 몰라 당황스러웠는데, 한 편의 글에서 단서를 발견했다. ‘시장의 자유’가 자유의 사회적 의미를 선점한 것이다. 대중의 의식에서 ‘자유’가 지워졌던 틈을 타서, 자유 스펙트럼의 일부만을 담은 의미가 자유의 전부인 마냥, 절대적인 정의인 마냥 대중을 향해 선포되었던 것이다. 그 갑작스러운 선공에 한동안 우리 사회에는 ‘자유란 무엇인가’가 화두가 되었다. 나 또한 한동안 관심 밖에 두었던 자유의 의미를 곱씹게 되었다. 그때 떠올랐던 책이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었다. 독서토론 모임의 첫 책이 『자유론』임을 알았을 때 더욱 반가웠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한참 우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가 입길에 오르던 때였다. ‘미네르바 사건’이라 회자되던, 웃지 못할 사건이 불과 10여 년 전 대한민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미네르바’라는 필명을 가진 블로거가 개인 페이지에 올렸던 경제 관련 분석 기사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판단한 당시 정부가 법까지 바꿔가며 ‘미네르바’를 찾아서 법정에 세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싶지만, 당시 이 일은 ‘웃프다’기 보다는 매우 진지하게 다뤄졌던 것 같다. 인터넷 글의 익명성이 사회 혼란을 부추긴다는 우려가 쏟아졌고, 반대편에서는 어떤 상황에도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외침이 이어졌다. 『자유론』을 펼쳐보니 생각과 토론의 자유, 사회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주와 근거에 대한 서술에 많은 밑줄과 메모가 남아있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한국 사회에는 어느 정도의 근거를 갖추어 토론하는 문화가 있었던 것 같다. ‘표현의 자유’와 ‘익명성의 부작용’에 대한 의견 교류가 일상에서도 이루어졌고,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바탕에서 익명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로 논의의 흐름이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미네르바 사태는 ‘익명성의 부작용’이라는 말을 붙일 수도 없는, 표현의 자유 침해에 훨씬 가까운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유론』이 쓰였던 19세기와 미네르바 사건이 있었던 2000년대 초반, 그리고 전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이 스마트폰을 매개로 촘촘히 연결된 현재를 비교해본다. 그 사이 우리 사회에는 계급, 신분 차이가 (명목적으로는) 폐지되었고 의무 교육을 통해 누구나 기본적인 교육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밀은 이러한 변화가 개인의 개별성을 위협하고 점차 욕망과 충동을 획일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는데,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는 선택의 다양성이 크게 확대되었지만, 그 내부에 자리 잡은 욕망의 본질은 ‘자본’을 중심으로 축소된 듯하기 때문이다. 밀은 자유를 위협하는 것으로, 대중, 다수의 횡포, 여론, 획일화 등을 언급했지만, 이는 산업혁명 이후의 대량생산체제가 주를 이루었던 시절과 맞물려있다. 소위 ‘4차 산업’ 시대를 겪고 있는 현재에는 오히려 가치의 중심축이 무너지는 데서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만인이 생산해낸 각기 다른 가치를 적절한 논의를 거쳐 수렴하는 절차가 약화되면서 지배적인 의견 형성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중앙집권적인 국가 공동체에 묶인 시민들은 소속 집단이 공유하는 가치를 확인할 길이 없어 혼란을 느끼며, 사회 곳곳에 만연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잣대조차 희미하여 더욱 막막해한다.


수많은 가치와 생각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기계적인 자유와 평등이 유효한지 생각해본다. 밀은 어떤 의견이든 100% 완전할 수는 없고, 나쁜 생각에도 일부 진리가 담겨 있을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진리라고 믿는 것에 더 많은 논거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의 견해는 물론, 본문에 인용된 “확정된 결론은 깊은 잠에 빠진다”는 표현에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인 기준은 명쾌하지만, 이를 활용하는 인간과 사회의 현실적인 면을 고려한다면 고민이 깊어진다. 그의 기준이 효력을 얻기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견해가 틀릴 수 있다는 입장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주된 의견 교류의 장인 온라인 공간에서 자기 견해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시정할 수 있는 태도는 소통을 위한 주된 덕목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선명하고 자극적인 생각을 신속하게 내놓는 사람에게 이목이 쏠린다. 한 번 주목받은 의견은 이성과 논리에 따라 차근차근 검증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소비된 뒤 더 자극적인 정보에 자리를 내준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긴 호흡과 깊이 있는 논리를 갖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이 어렵다. 따라서, 자기 논리의 오류와 비약을 검증하는 데는 과거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할 수밖에 없으며, 논의의 주된 참여자 중 한 사람이라도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연쇄 반응처럼 참여자 전체가 겸손의 태도를 폐기하게 된다. 최근 두 차례 선거 기간 중 이루어진 후보자 토론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던 상황이다.


그렇다면, 밀이 제시한 생각과 표현의 자유의 원리는 현대 사회에는 통용될 수 없는 무용한 것일까. 나는 오히려 위와 같은 맥락 때문에 더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단호하고 확정적인 메시지에 과하게 노출되어 있다. 이런 메시지는 기존에는 겸허한 태도를 가졌던 사람에게 그런 태도를 버리거나 이 공간에서는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말라는 압박을 은연중에 가한다. 하지만 오프라인은 물론 온라인에서의 토론 문화가 원래부터 유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물론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에게 눈길이 가지만, 더 풍부하고 논리적인 근거를 겸손한 어투로 표현하는 사람이 실질적으로 장을 지배했다. 지금은 반대다. 온라인에서 시작된 ‘실패를 모르는 생각’은 오프라인까지 이어졌으며, 이제는 매우 사적인 사이에서도 논쟁의 소지가 있는 주제에 대해 대화하기를 꺼린다. 토론은 곧 양보 없는 대화이자 거친 싸움이라는 인식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히려 친분이 두터울수록 정치 얘기는 꺼내지 말라는 얘기가 진리처럼 받아들여진다. 토론은 의견의 교류가 아니라 각자의 영역과 상대와의 간극을 확인하는 데 그침으로써 득보다는 해가 된다는 생각이 강해진 것이다. 지인과의 모임에서는 건설적인 토론이 (특히 돈과 관련된) 가벼운 대화로 치환되었다. 사회 갈등을 토론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가 사라진 것이다. 사회 갈등을 담은 대화는 ‘소모적’이라며 우리의 관심 밖으로 밀어내는 사이, 진정한 대화를 향한 욕구는 점차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 불편함을 직시하지 않는 한 우리 안의 갈증은, 개인과 사회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확정된 결론은 깊은 잠에 빠진다”는 진리가 더 큰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공고한 대화 문화를 한순간에 바꾸기란 어려울 것이다. 이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존의 잘못된 문화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다. 밀의 시대에는 여론, 즉 ‘대중의 생각’이 큰 영향을 미쳤다면, 지금은 대중의 의견이 사라진 대신 ‘대중의 태도’가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한치의 오류도 없을 것 같은 발언의 오류를, 내 의견이 틀릴 수도 있다는 태도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가 더욱 거칠게 목소리를 높여도, 자기만의 호흡으로 상대의 의견에 담겼을지 모를 ‘진리’를 검토하고 납득되는 부분은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논리를 강화하여 겸허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대화를 목격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태도가 ‘정상’이며 더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제스처를 적극적으로 취하고 응원해야 한다. (응원은 ‘좋아요’ 버튼 하나로도 미약하나마 가능할 수 있다.) 표현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최소한 실수를 모르는 의견들을 의심 어린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간혹 SNS상에 자극적인 의견을 개진하여 자신의 우월함(실제로는 우월하다는 잘못된 믿음)을 과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의견은 내용의 질과 상관없이 대중이 보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며, 이런 글에 동조함으로써 내용은 물론 태도에도 동의하는 메시지를 내보낼 수 있다. 내가 무심코 누른 ‘좋아요’ 버튼이 모여 매체의 생태계와 지배 문화를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상가라면 모름지기 결론이 어떻게 나든 자신의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없다. 단지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서 기존의 올바른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덕분에 실수를 피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적절한 공부와 준비 끝에 자기 혼자 생각하다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 진리의 발견에 더 크게 기여한다. (p. 72)

이 대목을 읽고 신영복 선생님의 “진정한 자유는 자기의 이유를 갖는 것”이란 메시지를 다시금 떠올렸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실수를 각오하고 끝까지 파고들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계속해서 경계에 서려 애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계에 서있는 것은 내 안의 불안을 자극하는 반면, 확실한 편에 서있는 것은 필요한 불안을 회피하도록 할 만큼 매력적이다. 나는 지식인도 아니고, 논리도 약하다. 그저 내가 선택한 매체에서 발견한, 옳은 것처럼 보이는 생각들을 하나씩 모아서 기억하고 그중 극히 일부는 삶에 녹여내고자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자유에 가까워진다고 믿지만, 이런저런 확정적인 메시지들에 쉽게 마음을 내주고 매몰되기도 하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거대한 실수를 깨닫고 절망하기도 한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투쟁하여 쟁취한다는 게 이런 의미일까. 


그럼에도 다시 찾은 『자유론』에서 얻은 희망이 있다면, 지지부진하고 자존심 상하기도 하고 아무한테도 인정받지도 못하는 이 투쟁의 과정이 ‘자유’의 관점에서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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