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을 사랑할까(에리히 프롬)』를 읽고
확답을 내놓고 싶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결국 이 고민은 한 번에 끝내고 마는, 고정된 결말이 될 수 없을 테니까. 살아가는 내내 세상과 함께 끝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면서 반복적으로 묻고 답해야 하는 과정일 테니까.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생각의 전환이 나에게 든든한 모터를 달아준 것 같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정신이 번쩍 드는 질문 내지 반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과학 기술과 이성으로 점철된 현대 사회에서 점차 소외되고 있는 인간이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을 사랑하기를 멈추고 탐욕스러운 소비를 매개로 죽어있는 것, 즉 '물질'에 집착한다고 지적한다. 물질을 향한 끝을 모르는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안의 불안과 공허함을 잠재우기 위해 더욱 격렬히 소비하거나 일을 비롯하여 외적으로 강제된 (그러나 강제되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활동에 전력을 쏟는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정작 중요한 질문을 잊게 된다. 나는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고 있는가.
많은 이들이 선뜻 ‘나는 삶을 사랑한다’라고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삶을 사랑한다고 답하는 이들도, 프롬이 말하는 방식의 사랑, 즉 ‘변화와 발전의 과정으로서의 삶’ 안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성장을 향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전체와 통합해나가는 방식을 실현하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예외는 있을지언정, 프롬이 질문을 던진 ‘우리’, 즉 산업화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사람들은 프롬이 정의하는 사랑의 반대 방향, 즉 ‘네크로필리아(죽음을 향한 사랑)’에 자기도 모르게 이끌리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안의 ‘네크로필리아’의 예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언젠가부터 한국사회에서는 자신이 소유한 물질과 권력에 대한 과시가 자연스러움을 넘어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영앤리치’로 일컬어지는 누군가가 명품을 플렉스하는 영상에 달리는 부러움의 댓글부터 승차감보다는 ‘하차감’이 중요하다며 빚까지 내서 고급 외제차를 구입하는 행위는 물론, '영끌'해서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하는 것이 대세가 되는 한편 모임 자리마다 각종 투자 정보와 실적을 공유하는 것이 빠지지 않는 것만 보아도 우리는 네크로필리아에 과몰입한 상태가 아닌가 싶다.
이처럼 누가 봐도 ‘물질’인 것에 대한 중독은 경계라도 할 수 있지만, 물질이 아닌 것으로 위장한 대상은 교묘하게 정체를 감추어 우리의 강력한 소비 심리를 조장하고 내면화한다. (사실 나는 이 편에 가까운 것 같다.) 이들은 외견상으로 윤리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수동적인 소비를 통해 영문도 모른 채 삶의 정수에서 멀어지게 한다. 건강, 행복, 환경 등의 이름으로 과포장된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소비가 특히 그렇다.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겠다면서 여러 개의 텀블러와 에코백을 수집하거나,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는 산책하지 않으면서 휴일마다 인스타 명소에 들러 사진을 남기거나, 또는 (실제로는 허영심일지도 모를)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자 이런저런 강연을 신청하여 지식을 축적한다. 그러나 이렇게 바쁘게 삶을 소비하는 사이,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대답할 수 있는 활동성이 소모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둔감해진다. 이를 의식하고 있다고 해도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에 나중으로 미루고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는 희망 아닌 희망을 품는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은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언제부턴가 처음 만난 사람은 물론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마저도 서로의 MBTI를 물으며 상대를 규정하고 동류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한다. MBTI에 대한 관심이 단순 재미를 넘어 절대적인 진리 마냥 떠받들어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나는 I(내향형)여서 사람들과의 만남이 불편해’, ‘나는 E(외향형)여서 집안에 가만히 있지를 못해’와 같은 이야기가 오갈 때,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인격체를 고정된 사물처럼 인식하게 된다. 인간 존재를 변화가 아닌 고정된 대상으로 바라보고 상대를 유형화한 채 편리하게 '소비'하면서 공통점을 기반으로 소외된 관계를 미봉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실제 MBTI 검사의 활용 취지와 달리 자신의 MBTI 유형에 갇힌 인간은 변화하기를 거부하고 테스트 결과가 보여주는 성향에 안주하려는 모습마저 보인다. MBTI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를 향한 거대한 물음에 손쉬운 답을 제공하는 도구로 소비되면서 당장은 자기 안의 불안과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잠재우는 것 같지만, 성장과 변화를 상실한 자아와 관계는 존재를 더 큰 불안으로 이끌 것이다.
이처럼 ‘사물’이 생명보다 우위에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 삶을 사랑하기 위한 방법으로, 프롬은 ‘창조적 인간’이 되어 소비와 수용의 태도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한 창조성은 ‘세계를 인식하고 그 세계에 대답하는 것’이다. 즉, 이성과 감성, 미의 감각을 모두 동원하여 온 존재로서 대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것이다. 장미를 바라볼 때 장미의 범주만 보고 ‘이것은 장미’라고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장미라는 실체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것이다. 책 속에서 예로 든 굴러가는 완두콩을 보는 행위는 그가 말하는 창조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완두콩이 굴러가는 것을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고 인식할 때 이는 결코 지루한 일이 아니며 자발적으로 지속할 수 있는 자유 행위가 된다. 이러한 행위는 겉으로는 활동성이 부족하고 수동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행위 당사자의 내면은 누구보다 자유롭고 활발히 세상과 교감하며 자발적으로 행위를 이어나간다. 자신의 온 존재가 고요히 주변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결국은 그 안에서 전체와 하나로 통합됨을 느끼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대박!’ 같은 감탄사를 남발하면서 분주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프롬이 제시하는 ‘창의적인 삶’은 우리에게 익숙한 ‘창조성’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그가 말하는 창조성의 핵심은 ‘생산’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 물론 뛰어난 재능과 기술을 갖추어 자신이 바라본 대상을 그림, 음악 등 가시적인 성과물로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이는 부차적인 것이다. ‘생산성’이 최우선인 현대사회에서는 (돈 되는) 새로운 재화, 서비스 등을 생산하여 수익으로 이어져야만 창조성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생산성’이라는 사회적 맥락만 떼어내면 우리 앞에는 무수히 많은 창의적 행위의 가능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생명이 있든 없든 우리 앞에 있는 모든 대상과 함께, 그 대상 속에서 우리는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고, 이는 자유로운 생의 감각을 일깨워 줄 것이다.
하지만 각종 미디어에서 쏟아내는 수많은 콘텐츠에 압도당한 현대인은 가능한 한 많은 작품을 섭렵하느라, 그림 한 점을, 음악 한 곡을, 책 한 권을 깊이 바라보고 그 안에 깊숙이 빠져보는 경험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산업화 이전 시대가 배경인 어느 외국 영화에서 침대 머리맡에 둔, 수십 번을 봐서 닳아 헤진 한 권의 책을 처음 읽는 문장인 마냥 낭독하면서 행복해하는 주인공을 보며 부러움을 느낀 적이 있다. 나도 그런 책 한 권이 있으면 좋겠다면서 시도해보려고 하다가도, 막상 한 권을 ‘끝내고’ 나면 다른 책을 집어 들고 싶은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매번 새로운 책 속을 질주하곤 했다.
그래서 나에게, 창의성을 ‘출생’의 이미지로 설명한 프롬의 메시지는 정신이 번쩍 뜨이게 했다.
인간은 안전을 뜻하는 이전 상태를 떠나기 무서워하지만 자신의 힘을 더 자유롭고 완전하게 사용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새로운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다. 인간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과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싶은 욕망 사이를 쉬지 않고 오간다. 모든 출생의 행위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놓아버릴 용기, 자궁을 버리고 엄마의 가슴과 품을 떠날 용기, 엄마의 손을 놓을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만을 믿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물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 다시 말해 자신의 창의성만 믿을 수 있는 용기 말이다. 창의적이라는 것은 인생의 전 과정을 출생으로 보며 인생의 어떤 단계도 최종 단계로 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온전히 태어나보기도 전에 죽는다. 창의성이란 죽기 전에 태어난다는 의미다. (p. 142. <4장 창의적인 삶> 중에서)
생산성, 소비, 경쟁과 생존 같은 자본의 논리에서 비롯된 수동적 욕망에서 벗어나 매 순간 관찰하고 발견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행위, 그리고 나에게 이런 힘이 있다는 확신과 용기에 주목한다. 가끔 소스병 뚜껑을 열 때 아무리 힘을 줘도 안 열릴 때가 있다. 뚜껑 자체가 단단히 봉해져 있을 때도 있지만, 종종 내가 제대로 힘을 주고 있지 않음을 발견할 때가 있었다. 내 힘으로는 병뚜껑을 열 수 없을 거라는 암묵적 무력감 때문에 손에 통증을 가하느니 적당한 힘만 가하다가 반응이 없으면 통을 타인에게 넘기자고 했다. 지금 나에게는 병뚜껑을 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강한 믿음으로, 양손에 제대로 힘을 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열릴지 말지에 대한 걱정은 나중으로 미뤄두자.
사회 연차가 쌓이면서 나는 점차 지인들 사이에서 ‘바쁜 인간’으로 통했다. 물론 절대적인 업무량이 많을 때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대개는 스스로 일을 만들어내고 그럴 수밖에 없는 그럴듯한 이유를 붙였던 것 같다. 그렇게 생성된 이유들은 점차 교묘하게 나를 조종해갔다. 처음에는 단순히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점차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사회적 의미로 확장되면서 더 많은 일을 끌어들이는 것의 당위성을 의심하지 못했다. 일에 공백이 생길 때에는 일터 밖에서 일을 만들었다. 부지런히 책을 읽고 독서 모임이나 강연, 워크숍을 찾아다녔고, 휴일에는 공백 없이 여행 일정을 잡아 떠났으며, 악기와 운동을 배우고, 집안 가구 배치를 바꾸고 새로운 요리를 시도했다. 화로 속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장작을 쏟아부었다. 이러한 행위들은 ‘진짜 활동성’이었을까, ‘가짜 활동성’이었을까.
오랜 기간 축적된 활동이라 하나로 싸잡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해 아무것도 감각할 수 없어, 한없는 무력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 괴로워했던 최근의 시간을 돌이킬 때 자유로운 내면의 선택이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은폐와 과도한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분주함’이라는 프롬의 표현이 최근의 내 삶에 딱 들어맞는다. 이러한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프롬은 ‘결정적인 힘과 상황을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러한 행위를 보이게끔 만드는 심리 기제와 사회적 맥락을 알아야 자기도 모르게 자리한 무력함을 인식하고 적극적인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내 안에 오랫동안 깊이 자리한 독서 습관과 자발적으로든, 비자발적으로든 읽어왔던 책들이 희망의 밧줄처럼 느껴진다. 지식으로 쌓여 있던 것을 내 안의 ‘강력의 행위 동기의 가치’로 전환시키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본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답은 명백히 ‘아니오’일 것이다. 거대하고 견고한 사회 구조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꿔 묻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을 사랑할 수 있는가.’
끝없는 생산과 소비를 기반으로 자신의 생산 능력을 입증해야만 하는 '최대 소비 체제' 사회에서, 나는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 수시로 업데이트되는 콘텐츠에서 시선을 돌려 탁자 위에 놓인 커피의 맛과 향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까. 모니터에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겨 한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지루해하지 않고 바라보며 그 안에 흠뻑 취할 수 있을까. 새로운 지식 쌓기에 골몰하는 대신,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끝없이 묻고 답할 수 있을까. 한 권의 책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페이지가 닳도록 오래오래 읽을 수 있을까. 확답을 내놓고 싶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결국 이 고민은 한 번에 끝내고 마는, 고정된 결말이 될 수 없을 테니까. 살아가는 내내 세상과 함께 끝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면서 반복적으로 묻고 답해야 하는 과정일 테니까.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생각의 전환이 나에게 든든한 모터를 달아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