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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리 Oct 17. 2022

나의 '물고기'를 찾아가는
(다소) 기나긴 여정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를 읽고

(✳︎ 이 책의 결말을 스포하지 말라는 글을 많이 봤습니다. 저도 그 흐름에 동참해야 할 듯합니다. 이 글은 책의 결말에서 시작됩니다.)


그럼에도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해서 의심조차 못했던 개념을 알아차리고 그 밖에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펼쳐지는 무한한 세계, 자유가 감지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같은 책을 두 번 읽었다. 처음은 지난 4월 갓 백수가 되어 삶의 의미를 부지런히 찾아 헤매면서, 그리고 6개월 만에 일터로 복귀한 시점에 독서토론 모임을 준비하면서 다시 한 번! 처음 이 책을 읽을 즈음 나는 인생의 동력과도 같았던 삶의 의미에 물음을 던지는 것에 덧없음을 느꼈다. 오랜 기간 내 인생의 ‘북극성'과 같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이 허물어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을 만큼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다. 북극성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조용한 곳에서 욕심 없이 나를 기쁘게 하는 작은 것들에 감사하며 살고 싶었다. 갓 스무 살을 넘긴 한 청년이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는 삶에 의미 따위는 없다며, 삶은 그냥 살아내는 거라며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최근 쉰 살을 넘긴 분이 동의했다. 그 확고한 대답에 ‘삶에 의미는 없는 거구나'하며 마음 언저리에 남아있던 씁쓸함을 쓱쓱 지워버렸다. 그 무렵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발견했다. 이 책의 추천 영상이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내 타임라인에 노출되었고, 나는 덥석 미끼를 물었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에는 책의 결말, 최종적인 메시지에 주목했다. 물고기(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자연에는 우열이 없으며 자연 상태를 특정한 개념–특히 ‘사다리'처럼 우열관계를 내포하는 언어–에 가두는 순간 우리는 더 큰 희망을 놓치거나 망치고 말 것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의 눈을 현혹하는 외피에서 벗어나 그 안에 담긴 알맹이를 볼 것, 제각각의 알맹이가 뽐내는 다양한 아름다움에 눈뜨고 이를 존중할 것! 그 뒤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제니 오델)』,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리히 프롬)』 등의 책을 읽으면서, 편견을 걷어내고 호기심 어린,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교훈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실전에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가끔 눈이 아닌 ‘머리'로 세상을 바라볼 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로 이어졌다. ‘00주의'로 끝나는 말에 갇히지 않고 내가 경험하는 세상을 유연하게 바라보려는 태도가 조금, 아주 조금 생겨났다.


그런데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더욱 눈여겨보게 된 점은 저자가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힘이었다. 룰루 밀러는 삶의 무의미함에 질문을 던지고, 단서를 찾아 헤매고,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놀라워했다가, 이를 뒤집는 단서에 실망했다가, 다시 힘을 내어 물음을 던지고, 또다시 단서를 찾아 자신만의 결론을 펼쳐나간다. 결말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 또 다른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지금껏 쌓아온 결말은 전복된다. 이는 마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물고기 표본을 지켜낸 과정과도 흡사해 보인다. 하지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과정에는 항상 ‘물고기'라는 답이 정해져 있었던 반면, 저자의 이야기는 사전에 정해진 결말이 없이 계속해서 미지의 세계로 뻗어나간다. 계속해서 혼돈 속으로 자신을 내던진다. 조던의 이야기와 저자의 이야기가 다른 결말(?)을 맞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나는 책의 후반부에서 몇 차례 이야기 전복을 겪은 후에는 결말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게 되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여러 학자들, 수용소 피해자인 애나, 친구 헤더, 아빠, 그리고 ‘부적합자'로 여겨졌던 큰언니 등– 의 각기 다른 반응에 주목하며 매듭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으로 보이는 지점에 또 다른 물음과 함께 이어지는 에필로그는 이 책의 백미였다. 아름다운 장면 묘사와 시적인 표현도 그렇지만, 이 안에 담긴 이야기가 희망을 증명해내는 방식이 놀라웠다. 삶의 의미, 희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뒤 저자는 진심으로 희망을 믿게 된다. 새로운 연인과 함께 찾은 바닷가에서 뜻하지 않게 스노클링을 즐기면서, 자신을 향해 자유롭게 헤엄쳐오는 연인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는, 완전한 자유를 경험한다. ‘물고기'를 포기하자 얻게 되는 예상 밖의 세계들! 어릴 적에는 상상할 수 없던 언니의 미소와 그녀가 아빠와 교류하는 따뜻한 감정들은 그 희망의 단서가 된다. 삶은 언제나 우리의 예측을 빗나간다, 그것도 아아주 많이! 저자가 평소처럼 스노클링을 거부했다면 이처럼 완전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물고기'를 포기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이 순간은 오랫동안 ‘성급한 긍정'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도 끈질기게 의심하고 자기만의 근거를 쌓아왔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질서 밖의 세상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자신 또한 질서 밖으로 나와야 한다. 알맹이와 알맹이가 만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야'라는 온갖 틀에 자신을 가둔 채 만나는 세상은 딱 내가 가진 틀만큼일 것이다. 그 틀은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사소한 습관일 수도, 삶 구석구석에서 기쁨과 위안을 주는 취향일 수도,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굵직한 잣대가 되는 가치관일 수도 있다. 어떤 것들은 타고난 기질이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일 테고, 어떤 것들은 직간접적으로 겪은 환경과 사람들의 영향으로 서서히 내 것으로 자리 잡았을 수도 있다. 어떤 경로를 거쳤든 세상의 무수히 다양한 가치를 담아낼 수는 없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오류의 가능성을 잊게 된다. 잊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잊어버리다 보니 어느 순간 잊어버렸다는 생각조차 잊게 된다. 고독은 삶에 깊이를 더해주지만, 고독하기만 한 사람은 자기 안의 깊은 우물에 갇혀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사람, 공간, 현장 속에, 그리고 다양한 책 속의 다양한 이야기 속에 나를 풀어놓아야겠다. 물론 다른 자극에도 같은 패턴으로 반응하지 않도록, 호기심과 의심이란 무기로 단단히 무장한 채 말이다!




그리고 나의 에필로그…

정작 나의 ‘물고기'는 무엇인지 묻지 않고 넘기려다가 룰루 밀러처럼 조금 더 이야기를 밀고 나가고 싶어졌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무기는 뛰어난 회복탄력성이었다. 회복탄력성은 최근 교육계에서도 매우 ‘핫한' 키워드이다. 특히 사회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하나의 거대한 목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것보다는, 과감히 도전하고 실패에서 빠르게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회복탄력성의 중요성이 더욱 대두되었다. 책 『그릿』에서 저자 앤절라 더크워스는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상위 목표는 끈질기게 붙잡고 놓지 않는 한편, 하위목표는 유연하게 조정해나가는 공통점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내놓은 근거들–뉴욕타임스의 보도국장, 뉴요커의 전설적인 전속 만화가 등–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나는 작년 한 한기 동안 이 책과 책의 주제인 ‘그릿’을 주제로 학생들과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했다. 책에 서술된 ‘그릿'의 효과는, 이를 명쾌히 보여주는 목표 위계(goal hierarchy) 방식은 금방이라도 실패를 딛고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주었고, 여기에 ‘성장 마인드셋'은 기름을 붓는 것 같았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진행될수록 시원치 못한 느낌이 들었다. 왜 상위 목표는 고정되어야만 할까. 왜 상위 목표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실패에서 빠르게 회복되어야만 할까, 빠르게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할까. 상위 목표–이것은 곧 인생 목표(life goal)이기도 하다–에 오류가 있으면 어떻게 하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물고기처럼!


나에게 ‘북극성'의 개념을 심어준 책이 있다. 10여 년 전 혜성처럼 등장해서 초베스트셀러에 등극한 『미움 받을 용기』! 이 책에서는 인생의 길 위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에 대한 대비책으로 자신만의 길잡이별을 마련할 것을 제안한다.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마다 방향을 알려주는 것, 인생 목표, 목표 위계의 최상위를 차지하는 것,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고기(어류)'! 당시 첫 직장을 그만두고 길을 헤매던 시절 이 책의 명쾌한 해결책에 나는 나만의 길잡이별을 설정했다. 그리고 이제껏 그 길잡이별을 따라서 살고자 했다. 


하지만 별에도 수명이 있다! 길잡이별이 수명을 다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암흑 속으로 사라진 별을 두고 계속 존재한다고 우기면서 붙잡고 있는다고 사라진 별이 다시 생기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사멸한 별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실체 없는 열정만 쏟아붓고 있었다. 밤하늘에 펼쳐진 무수한 별들은 바라보지 못한 채, 그 하나의 빛에 내 모든 것을 걸고, 그럼에도 대답이 없자 인생에 의미란 없다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것을 왜 놓기가 힘들었을까. 내 안에 길잡이별 개념을 탑재한 것은 10여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왜 그 밖에 있는 것을 바라볼 생각조차 못했을까. 너무 식상한 말이지만,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 같다.


처음 이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내 안에 뿌리박고 있던 길잡이별의 존재를, 그 영향을 깨닫지 못했다. 독후감의 분량을 훌쩍 넘어섰다며, 에필로그는 본문보다 짧아야 한다며 글을 황급히 마무리 지었다면 어땠을까. 작년에 함께 수업한 학생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릿의 추억(?)을 복기하기를 머뭇거렸다면, 노트북이 올려진 무릎 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나의 털친구(우리집 냥이)에게 굴복하고 쉽게 자리를 내어주었다면? 이렇게 나도 희망의 근거를 찾았다고 선언하는 것은 성급한 긍정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해서 의심조차 못했던 개념을 알아차리고 그 밖에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펼쳐지는 무한한 세계, 자유가 감지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자유를, 혹은 혼돈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읊어본다. ‘길잡이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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