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카인드(뤼트허르 브레흐만)』를 읽고
내가 믿는 것이 나를 만든다. 나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고, 내가 예측하는 일은 일어나게 된다. 이 명제에 강력한 신뢰를 보낸다.
기본 소득이 주어졌을 때 인간은 능동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나태와 의존의 늪에 빠져 퇴보할 것인가. 기본 소득에 대해 덮어놓고 찬성하지만 (더 정확히는 찬성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를 느끼지만) 이 이슈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어갔을 때 막연한 우려를 거둘 수 없었다. 자본주의의 가속화로 남아도는 이윤이 인류 전체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활용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행위의 올바름과 무관하게, 행위가 야기하는 다양한 효과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기본소득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인류의 노동 해방이 인류의 퇴보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노동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여건이라면 많은 시간과 노력과 고통을 수반하는 창조적인 활동에 나서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 노동은 고통일 뿐이며, 먹고 살기 충분한데도 노동에 참여할 정도로 인간이 부지런한 종이 아니라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나는 이러한 우려가 인간에 대해서도, 노동에 대해서도 반쪽짜리 이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의 스펙트럼을 그렸을 때 한쪽 끝에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일이 있다면, 반대쪽 끝에는 변화무쌍하고 창조적인 일이 있다. 후자의 영역에서 인간은 재미를 느낀다.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인 우리는 재미있는 일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먹고사는 것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다.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나는 이 부분에 더욱 공감한다. 즉, 기본적인 삶의 질은 보장되지만, 창조적 활동에 나설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들 간에 또 다른 (지금보다 극심한) 불평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이윤이 아니라 자아실현과 같은 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을 시작하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지적 토대와 내면 수양이 필요하다. 그러나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이유로 교육, 문화 등의 기회에서 소외된 계층이 여러 고통과 난관, 도전을 극복하고 창조 노동에 뛰어들 수 있을까. 쉽게 긍정할 수 없었다. 선뜻 긍정하지 못하는 마음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왜 나는 인간의 자율성, 창조성이 계층에 따라 달리 발현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일까. 내가 추구하는 (혹은 추구한다고 믿는) 진보적 가치의 토대가 탄탄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답을 찾고 싶었다. 그 절실한 심정으로 뤼트허르 브레흐만의『휴먼카인드(Humankind)』를 읽었다.
이 책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다수의 믿음과 달리 인간의 본성은 선하며 인간은 다른 존재와 협력하고 소통하면서 진화해온 존재이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악한 본성’에 대한 근거는 대부분 잘못된 믿음에서 왜곡된 실험들, 미디어를 통해 유통되고 확대 재생산된 자극적인 정보들에 유래한 것으로, 우리는 인간이 친화력 있고 선한 존재라는 강력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저자는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한 믿음을 강화해온 주된 사례들(루시퍼 이펙트,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 캐서린 제노비스 사건으로 제시되는 방관자 효과 등)이 어떤 식으로 사실을 왜곡했는지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보여준다. 책에 제시된 예시들은 실제 상황을 왜곡한 2차, 3차 자료에 의해, 또는 출처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의 부정한 의도에 의해 악한 본성이라는 신화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차근차근, 확실히 짚어준다.
가장 강력해 보이는 사례는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이다. 저자는 실험자가 악한 본성에 의해 자발적으로 학습자에게 가하는 전기충격의 강도를 높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시한 근거에 따르면 당시 학습자에게 '진짜' 고통을 주고 있다고 믿은 사람은 전체 참여자 중 56퍼센트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실제 고통을 가한다고 믿은 경우에는 실험에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전기 충격의 강도를 높인 것은 실험자들의 순수한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험보조원들의 강요와 압박이 있었다고 한다. 참여자들을 설득한 논리가 '인류를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점에서, 이 실험은 선의에 기반하여 수행된 악행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예시로는 '방관자 효과'의 대표 격으로 거론되는 캐서린 제노비스 살해 사건에 담긴 함정을 지적한다. 한밤중에 동네 거리에서 캐서린이라는 여성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수많은 주민들이 그녀의 비명을 듣고도 모른 척하여 그녀가 제때 구조되지 못한 채 죽게 되었다. 내가 안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나서겠지 하는 마음이 비극을 야기한다는 예로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사건을 되짚어보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건 초반에 이미 몇 차례의 신고가 있었으나 단순 부부싸움이라 판단한 경찰이 출동하지 않았으며, 실제 방관자로 거론된 사람들의 수치는 단순히 근처에 거주하거나 미약한 소리라도 들어서 조사를 받은 사람들의 숫자였던 것이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사건이 부풀려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근거에 오류가 있다면, 선하다는 증거는 무엇일까. 저자는 드미트리 벨랴예프의 은여우 길들이기 실험을 들며 ‘우리 종의 진화는 가장 우호적인 종의 생존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실험은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라는 책에서도 자세히 언급된 사례이다. 인간에게 친화적인 은여우 개체만을 골라 여러 세대에 걸쳐 교배하자 점차 외형이 귀엽고 친화적으로 변화했으며 지능도 더 높아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즉, 생존에 유리한 특성은 ‘공격성’이 아니라 ‘친화성’인 것이다.
이처럼 더 큰 친화력을 발휘하는 종이 생존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사피엔스는 이러한 종 특성을 갖고 있다. 이는 지능면에서 우위를 점했을 것으로 보이는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라 사피엔스가 최종 생존 종이나 지구상의 지배적인 종으로 거듭난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네안데르탈인이 천재라면 사피엔스는 친화력 좋은 모방자로서 협력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지식을 더욱 빨리 습득하고 활용하면서 생존 경쟁에서 다른 종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론과 실험 근거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선한 본성을 보여주는 일화들도 제시된다. 특히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의 실제 상황과도 비슷한 실화인 아타섬에서 발견된 소년들의 이야기도 언급된다. 소설에서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이 갈등과 불신, 싸움으로 공멸하는 결말을 맞는 것과 달리, 아타섬에 조난된 소년들은 협력과 신뢰를 통해 더 잘 생존하고 어려움을 극복해나갈 수 있었다. 또 다른 예로, 세계대전 당시 대다수의 병사들이 목숨을 위협받는 순간에도 총알을 장전만 하고 적군에게 발사하지 않았던 사실 또한 같은 종을 위협하고 살해하는 것이 종 특성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선한 본성과 달리 인간이 악한 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된 상황들도 존재한다. 우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우리와 가장 비슷한 사람들에게 더 친밀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우리 편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친밀감을 유발하는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오히려 ‘우리 편 먼저’라는 감정을 고취시키고 상대를 공격하게 된다. 특히 ‘공감’의 특성상 감정이 이입되는 대상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춤으로써 그 외 나머지 대상들은 배제하거나 적대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외국인 혐오 정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회적 맥락에서는,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 이동하면서 사유재산에 따른 권력이 탄생한다. 권력의 특성상 권력자는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타인을 열등한 대상으로 평가절하하고 반인간적인 태도로 대한다. 문제는 반인간적인 시선과 태도를 받은 인간은 자신을 반인간적인 존재로 여기게 되어 반인간적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한 번 형성된 ‘인간은 악하다’는 믿음은 '노시보(nocebo) 효과'를 일으켜 우리가 실제로 악한 인간성에 기반하여 행동하도록 만든다. 특히, 계몽주의 이후 도입된 근대 민주주의 및 법치주의 모델은 인간의 악한 이기심을 억제하고 균형을 맞추는 데 제도적 초점을 맞추었으며, 경제학 이론은 인간의 이기심을 공공복리 향상으로 활용하는 데 기초를 둔다. 이처럼 오랜 기간 일상 곳곳에 침투한 악한 본성에 근거한 법과 제도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이기심을 억제하고 타인의 이기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믿음을 공고히 하도록 부추겼다.
그렇다면,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우리 안의 차별과 혐오를 끝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더 많은 접촉’이라고 단언한다. 인간은 상대와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멀수록 더욱 강한 혐오를 느끼고 더욱 강하고 맹목적인 비판을 가한다. 인종혐오의 갈등 속에서도 자신의 이웃을 지키려는 행동과 인터넷 화면 너머의 익명의 존재를 향한 폭언은 대상과의 거리와 혐오 간의 비례 관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강력한 갈등 상황으로 꼽히는, 성별 갈등, 정치적 갈등, 세대 갈등은 실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미약한 갈등으로 관찰되며, 생각의 차이에 그칠 뿐 극렬한 혐오를 자아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온라인에서 접한 혐오 프레임이 주변인들에게 성찰 없이 씌워지면서 원활했던 관계가 소원해지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정치권에서, 언론에서 자기 존재의 당위를 높이기 위해 이러한 갈등을 활용하는 것이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이유이다. 미디어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은 특정 계층에 대한 프레임이 일상 깊숙한 곳으로 스며드는 순간 우리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회복 불가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미디어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하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휴먼카인드』를 읽으면서 그간 내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던 악한 본성에 대한 무의식적 신념을 느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게으르고 충동적이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정직, 신뢰, 공공선과 같은 선한 덕목을 발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영향보다는 개인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둔 다양한 행위들(부동산 투기, 주식 광풍 등 대부분 돈과 관련되어 있다)은 이러한 덕목을 ‘제대로’ 장착하지 못했거나, 잘못된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선한 덕목이 무력화된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현상은 인간 본성의 디폴트 값이기에 어쩔 수 없으며, 교육의, 사회의 실패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시선은 자연히 타인을 시니컬하게 바라보고 경계하는 태도로, ‘그들’과 다른 ‘우리’와 ‘우리’ 입장의 정당성 강화로 이어졌으며, 정당성이 강화되면 될수록 상대방에 대한 혐오 어린 시선도 더해졌다. 타인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며 나와 비슷한, 의미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의 일원으로 일반화하여 바라보았다. 언론 플레이에 놀아나는 무지몽매한 개인으로, 사회 문제에 대한 분별력 없는 판단으로 사회의 진보를 더디게 만드는 암적인 존재로 여겼다. ‘그들’ 또한 마찬가지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지 않았을까. 평범한 사람들이 실체 없는 갈등의 고조로 정신적 고통을 받을 때, 권력을 쥔 자들은 이를 자극하며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그들이 시민을 대하는 방식은, 곧 시민이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쳐왔다. 정치공학적으로 계산된 갈등의 부추김은, 과거 지역 갈등부터 현재의 세대, 성별 갈등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혼란과 갈등을 낳았다. 자본에 기댄 미디어의 홍수와 무분별한 정보의 범람, 이를 깨어있는 매 순간 손에 쥐고 있게 만든 스마트폰의 보급은 ‘조작된 갈등’에서 빠져나오기 어렵게 만들었다. 우리는 강력한 덫에 걸리고 만 것일까. 우리가 이 덫에서 빠져나와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배려와 존중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것은 무리인 걸까.
이 지점에서 나는 저자가 재조명한 ‘피그말리온 효과’에 기대게 된다.
당신에 대한 나의 기대는 당신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결정한다. 당신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당신의 기대와 그에 따라서 나에 대한 당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호모 퍼피는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맞춰지는 안테나와 같다.
그래서인지 책에 제시된 넬슨 만델라와 콘스탄드 빌욘과의 첫 만남, 넬슨 만델라가 자신의 적과도 같은 상대에게 보낸 강력한 신뢰, 그 신뢰가 빚어낸 역사에서 단단한 희망을 보았다.
그는 나에게 차를 마시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답했고 그는 한 잔을 따라주었다. 우유를 넣느냐는 질문에 나는 넣겠다고 답했고, 그는 우유를 따라주었다. 그리고 설탕을 넣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자 설탕을 넣어주었다. 내가 할 일은 그것을 젓는 것뿐이었다!
만델라가 보낸 신뢰와 환대는 빌욘 장군으로 하여금 만델라의 뜻대로 움직이는 마법을 발휘했다. 상대에게 보내는 강력한 신뢰는, 상대가 그 신뢰에 기반하여 행동하게 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저자는 더 나아가 일상에서의 해법으로, ‘의심스러운 상황에서는 최선을 상정하라’고 제시한다. 우리의 신뢰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신뢰로 얻는 것에 대한 작은 보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마저도 영향력이 제한된다는 태도는 마지막 남은 불안감마저 날리는 시원한 어퍼컷 같았다. 어정쩡한 신뢰야말로 상대로 하여금 ‘그럼 그렇지’라며 그나마 갖고 있던 기대마저도 거두게 되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뿐이다. 상대의 진심을 믿는 태도, 그에 못 미치는 결과에 크게 낙심하지 않고 존재에 대한 신뢰를 견지하는 태도야말로 '호모 퍼피(친화적인 인간)'로서 가장 자연스러운 태도이자 생존에 가장 적합한 전략이지 않을까. 여기에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처음 이 책을 집게 만든, 기본 소득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표면적으로는 기본 소득을 지지하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불편한 심정을 거두지 못했던 이유는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의심 때문이지 않았을까. 인간은 경제적인 비용편익 분석에 의거해서만 행동하며, 경제적 이득이 없으면 아무리 가치 있는 행동일지라도 실행하지 않을 거라는 단정, 인간의 게으름과 이기심으로 인해 삶의 안정성은 인간의 창조성을 자극하지 못할 거라는 우려, 좀 더 배우고 선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 의해 착취당할 거라는 불안의 근저에는 인간의 선한 의지에 대한 불신을 넘어 악한 본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잘못된 전제 위에서는 아무리 좋은 판단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의 이러한 믿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학창 시절 성선설과 성악설을 배울 때, 나는 이 둘이 매우 팽팽해서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기 어렵지만 성선설이 진실이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성선설을 제시한 사람은 선한 사람, 성악설을 제시한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보다 더 어릴 적, 사람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는 당부를 주변 어른들로부터 수시로 들었고, 거기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여 지적을 들을 때마다 정체 모를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주로 동화에서 접한 권선징악의 교훈이 점진적으로 미친 영향일 수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는 내 안의 악을 억제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함께 자라났으며, 이는 자연히 ‘내 안에는 악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전제로 한다.
이렇게 나는 선천적인 악을 후천적인 선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태도를 갖게 된 것은 아닐까. 실제 나는 (만들어진) 본능에 기반해 성악설을 지지하고 있었으나, 내 안의 호모 퍼피가 성선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놓지 않도록 주입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라는 이 믿음 하나에 따라 세상은 완전히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가 일순간 섬뜩함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불편함은 희망 어린 기대로 변모했다. 호모 퍼피로서 바라보게 될, 더욱 적극적인 신뢰에 기반하여 타인을 바라보고 이해하게 될 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조각 난 채 은밀히 충돌하고 있던 희망 어린 미래에 대한 그림이 조화로운 형성으로 통합되는 느낌이다.
“우리가 믿는 것이 우리를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고, 우리가 예측하는 일은 일어나게 된다.” 내가 믿는 것이 나를 만든다. 나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고, 내가 예측하는 일은 일어나게 된다. 이 명제에 강력한 신뢰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