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이)』를 읽고
* 이 글에는 소설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이 작품의 먹먹함은 어쩌면 과거의 가치가 부정 당해서라기 보다는, 현대 사회에 결핍된 무언가를 과거에서 발견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안에 오래 남아 있었을지 모를 '여름'이 더욱 간절해진다.
마쓰이에 마사이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잔잔하게 올라오는 먹먹함의 정체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무라이 슌스케 설계사무소 직원들이 여름별장에서 함께 보낸 한 철 동안, 길게는 무라이 슌스케와 그의 직원들이 합을 맞춰온 오랜 시간 동안 켜켜이 쌓아온 열정과 인내의 결실을, 이후의 행로에 대한 아쉬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막막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더해가던 중, 불현듯 이 작품이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는 모든 고전적 가치에 보내는 따뜻한 헌사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작품 전반에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건축가 무라이 슌스케는 자연을 비롯한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자신의 건축 철학으로 고수한다. 그가 설계하는 건축물은 건축물이 놓이는 대지와 이를 둘러싼 주변 환경, 전통적인 자재와 축조 방식, 건물 내부에 설치될 가구의 디자인, 이를 이용하게 될 사람들의 특징과 그들의 예상 동선이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 속에 조화를 이루며 융화된다. 슌스케의 철학은 ‘건축은 예술이 아니라 현실’ 표현으로 정리될 수 있다. 건축물 자체로 돋보이기보다는, 건축물의 실효성과 조화로움에 가치를 둔다. 그래서 그는 교회당의 의자 이음매의 작은 간격이 초래할, 감지할 수도 없을 만큼의 불편함을 이유로 이미 설치한 의자를 전면 교체하기도 하고, 도쿄를 집어 삼킬 만한 대지진 속에서 자신이 지은 건물만 오롯이 건재한 것을 두고 '끔찍한 일'일 것이라 표명하기도 한다. 이같이 완고한 가치 철학은, 하루에 딱 10개의 연필만 깎아서 그 이상의 낭비도, 게으름도 없이 설계 도면을 그릴 만큼 엄격한 자기 규율과 자기 통제를 통해 지켜진다. 클라이언트의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건축가로서 소신을 고집스럽게 지켜내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방식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하나의 가치보다는 주변의 변화와 자극에 발빠르게 대응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방식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다소 낡고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요즘 시대에 더 익숙한 것은 무라이 슌스케와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는 후나야마 게이이치의 방식일 것이다. 후나야마의 건축물은 누가 봐도 그의 건축물임을 알아차릴 만큼 개성이 강하다. 그만큼 주변과의 조화보다는 건축물 자체로서의 예술성과 독창성에 무게가 실린다. 공교롭게도 무라이 슌스케와 후나야마 게이이치가 ‘현대도서관’ 설계 모델을 두고 경합을 벌이는데, 최종 승자는 후나야마가 된다. 후나야마의 건축 양식이 시대 흐름에 더욱 부합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만큼 어찌 보면 놀랍지 않은 결말일 수 있다. 무라이 슌스케의 갑작스러운 뇌경색은 이러한 시대 정신에 손을 들어주면서도 과거의 가치를 대변하는 무라이 건축에 명예로운 퇴로를 열어준 장치로까지 느껴진다. 무라이 슌스케가 대변하는 고전적인 가치가 시대로부터 아예 외면 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 위상이 상대적으로 하락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점을 의식한 듯 무라이 슌스케도 자신의 건축 철학을 지켜내면서도 새로운 시대 흐름 (혹은 압박)을 받아들여 기존보다 모던한 느낌의 설계를 진행한다. 그럼에도 그의 모델은 도쿄의 랜드마크가 될 도서관의 디자인으로 허락 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설계는 모형으로 남아 생명을 부여받지 못한 채 아크릴 상자 안에 갇혀 서서히 잊혀진다.
일생을 바쳐 소중히 여기고 지켜온 것이 세상의 외면을 받고 스러져 가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이 어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괴롭다. 그럼에도 일말의 희망이 느껴지는 것은 무라이 슌스케의 건축 철학을 굳건히 지지하고 지켜내는, 사카니시 도오루로 상징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최고로 인정 받는 것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를 지켜내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 시대가 추구하는 자유로운 다양성이 적정선의 윤리와 예의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개인의 무한한 자유에 기반한 창작이 가능한 시대에도 모든 창작물은 완벽히 창작자만의 만족을 위한 것이 되기 어려우며, 소수일지언정 세상과 소통하기를 갈망한다.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 또한 기존의 고전주의 양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오히려 고전주의라는 견고한 기준점을 통해 더욱 자유로운 선택지를 만들어가며 시대 속에 연착륙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무엇보다 무라이 설계사무소는 여름 별장과 그 안의 모든 구성원들이 쏟아낸 열정과 인내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여름 별장에서의 시간이 더욱 아름다웠던 것은 그 안에서 이루어진 일과 생활의 방식이 현대인이 갈망하는 공동체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전체 일과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각자가 맡은 일을 충실히 수행하며, 직원 한 명 한 명의 장점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 상반된 의견을 조율하고 타협하여 더욱 좋은 안으로 발전시키는 모습이 매우 이상적이다. 그에 비해 우리가 몸 담은 사회는, 각자의 설계도면이 최고라고 우기며 자기 생각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것이 궁극의 목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통과 타협보다는 자기 의지의 관철이 우위를 점하는 현실에서, 저마다의 자유와 개성은 보장될지 모르지만 공동체의 해체와 그로 인한 사회관계망의 약화 등의 부작용도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이는 결국 개인의 자유를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인 만큼, 우리는 무라이와 후나야마로 대변되는 두 개의 조류 사이에서 적절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현대 사회에는 수많은 멘토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시대의 어른’이라 불리는 멘토는 부재하게 되었다. ‘시대의 어른’이란 이름으로 개인의 생각과 행동 범위를 제한하고 압박하는 측면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이름과 가치 아래 하나의 공동체로 끈끈한 연을 맺으며 풍요로운 관계망 속에서 안정감을 느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면에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건축에 국한하지 않고 개인과 사회의 존재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스승의 가치를 굳건히 지켜나가며 ‘요즘 사람’ 같지 않은 행보를 이어가는 사카니시의 선택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30여 년이 흐른 뒤 다시 마주한 현대도서관의 설계 모형을 바라보면서 사카니시는 이렇게 생각한다.
오랫동안 잠든 채였지만 각인된 것은 상실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의 먹먹함은 어쩌면 과거의 가치가 부정 당해서라기 보다는, 현대 사회에 결핍된 무언가를 과거에서 발견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안에 오래 남아 있었을지 모를 '여름'이 더욱 간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