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보리 Oct 27. 2022

이야기를 피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닷가에서(압둘라자크 구르나)』를 읽고

결국 환대의 시작은 세상이 정한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에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용감하게 듣고, 상대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용감하게 해내는 인내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난민’이란 말을 들었을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보트피플’이었다. 작은 고무보트에 수십명이 빼곡히 탄 채 물살이 거센 바다를 위태롭게 건너는 모습. 이들은 왜 위험천만한 보트에 목숨을 건 채 바다를 건너올 수밖에 없었을까. 왜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몇 해 전 터키의 해안가 모래사장 위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시리아 난민 아이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은 난민을 하나의 집단에서 개별적인 인간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쿠르디 또한 시리아 내전을 피해 보트에 올랐다가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이 한 장의 사진은 인도적 차원에서 난민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었고, 실제 유럽 각국에서도 난민수용정책을 내놓았으며 난민캠프에서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의 미담이 다수 보도되었다. 하지만 곧, 장기화된 내전으로 수많은 난민들의 입국 행렬이 이어지자 유럽사회는 난색을 표했다. 극보수층의 확대와 더불어 난민 수용에 대한 적대적인 반감도 늘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문화를 훼손하며 범죄를 야기한다는 추측에 가까운 이유때문이었다. 안타까운 비극이든 감정적인 반응이든 인간적인 미담이든 간에 일련의 뉴스를 통해 내 안에 각인된 이미지는 이랬다. 그들은 우리와 많이 다른 존재라는 것, 그 핵심은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 당했다는 것. 


난민 문제를 물 건너 남일처럼 여기던 한국 사회에도 (거의) 전국민이 난민 수용을 두고 열띤 논쟁을 하게된 계기가 있었다. 무비자 입국이 허용된 제주도로 예멘 난민 수백명이 입국하여 난민 자격으로 체류 허가를 신청한 것이다. 한국사회는 이들의 난민 자격을 두고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그동안 머릿속에 있던, ‘보트피플’로 상징되는 난민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점들–보트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왔다든지, 행색이 말끔하다든지 하는 것들–을 들어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로는 보트보다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위험천만한 보트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비자 문제와 더불어, 입국 시 사용한 배를 압수해야 한다는 EU국가들 간의 방침으로 인해 난민들이 ‘뱃값’을 통째로 지불해야 한다는 데 있다고 한다.) 난민 신청을 불허해달라는 국민청원이 20만(기사를 찾아보니 70만에 달했다고 한다)을 넘었다는 점은 우리 사회의 폐쇄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난민 문제가 연일 주요 뉴스로 보도되고, 다뤄지는 방식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난민 문제가 일상의 주제로 들어오면서 더 이상 이 일을 남일로 미뤄두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난민들을 대하는 태도가 폐쇄적일지언정, 그들이 우리와 공존해야만 하며, 난민조약에 가입한 국제사회의 일원인 이상 불편한 이유들을 들어 국경을 폐쇄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임을 인지했다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그렇다면 변화는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단순히 그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으니 인도적인 차원에서 도와야 한다는 마음이면 되는 걸까. 이런 ‘시혜적인 태도’는 옳은 것일까. ‘우리’와 ‘그들’은 정말 다른 존재일까. 탄자니아의 망명 작가인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바닷가에서』를 읽으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점차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난민’이라는 이름에 갇혀 보이지 않았던, 인간 존재로서 공유하고 있는 감각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선, 등장인물들이 체류국에서 겪는 상황들이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 약자가 상대적 강자로부터 겪는 방식과 본질적으로 비슷해보였다. 그것은 ‘차별과 배제, 그리고 혐오의 질서'였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주요 화자인 살레 오마르는 영국으로 망명 신청을 하면서 상대의 언행과 그 속에 담긴 진의 간의 간극을 파악하느라 극한 긴장 상태에 놓인다. 체류국 사람들이 표하는 걱정과 우려, 연민으로 포장된 말과 행동의 이면에는 정작 자신들이 불리하거나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많은 나이에 어떻게 이 사회에 적응하려 하느냐는 물음은 결국 그들의 망명을 무책임함과 도덕적 해이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속내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임시 거처를 운영하는 실리아는 난민 수용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맹비난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헛간 수준의 거처를 제공하고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끼니를 제공하면서 그들을 자신과 동등한 시민으로 대하지 않는다. 입국 심사가 진행됨에 따라 주인공은 체류국 사람들에게 해결해야할 하나의 ‘케이스’로만 여겨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을 해결하고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도 없다. 그저 이 나라가 자신을 받아주기를, 무탈히 서류 심사를 통과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적극적인 해결 노력으로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를 잘하지만 못 알아듣는 척해야 한다. 소통의 의지를 단념해야 한다. 적극적인 행동을 적극적으로 그만 두기로 마음 먹은 바틀비처럼. 무력한 상황에서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자유의지는, 행동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일 것이다. 


이 소설은 난민들의 상황을 연민 어린 시선에 가두지 않음으로써 난민 문제를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 이야기 속 난민들 또한 출신 국가, 연령대, 언어 능력, 체류 시기 등을 바탕으로 자기 집단 내에서 암묵적인 계급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잣대로 구획된 계급에 따라 난민 집단 내에서 또 다른 차별과 배제가 이루어진다. 이는 그들이 체류 중인 동독에 대한 폄하에서도 드러난다. 자신들이 선호하는 ‘코카콜라와 청바지의 나라’가 아닌, 사회주의 체제를 따르는 국가임을 들어 교실에서 동독 교사들을 은밀히, 혹은 대놓고 무시하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특정 문화나 체제의 ‘도덕적 우월성’에 기댄 차별과 배제는 ‘식민주의’의 유산이기도 하다. 서구 문명이 비서구 문명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미개한 비서구지역을 ‘문명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서구 중심의 식민체제를 정당화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을 비롯해 식민주의의 몸살을 앓은 국가들은 자신들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열등한 것으로 인식하고 이를 개조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인 듯 여기게 되었다. ‘문명’을 받아들여 ‘개조’한 정도에 따라 지배관계가 형성되었다. 이 ‘문명’의 정체는 시대를 거듭하며 종교, 과학 기술 등을 거쳐 ‘자본주의’로 몸체를 바꾸었고, 우열을 가르는 최고의 기준은 ‘자본’이 되었다. 현 사회는 겉보기에는 뚜렷한 구심점 없이 다원화된 것 같지만, 수많은 욕망의 구심점은 ‘자본'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와 같이 자본 중심의 실질적 식민체제가 지속되는 한 출신국가의 GDP에 따라, 개인의 경제력에 따라 우열을 나누고 차별하는 행위 또한 사회 곳곳에서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소설에 등장한 상황은 난민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특정 체제와 이념을 기준으로 주종 관계를 만들어내는 사회구조에 속한 우리 모두가 처한 현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는, 그리고 난민들의 삶은, 결국 인간 소외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로부터 강요된 특정 기준에 따라 우열이 나뉘는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정당한 소속감을 느끼기 어렵다. 획일적인 목표를 공유할 때 사람들은 누가 목표 지점에 더 가까운가를 기준으로 우열이 나뉜다. 이는 모두가 우위를 점하고 싶은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에 근거해서 살도록 부추긴다. 개개인이 주변 압박으로 진정으로 원하는 터전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정서적 난민’이 된다. 누구도 현재 위치를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현 위치는 목표 지점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기착지일 뿐이며,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정확히는 더 나은– 장소로 이주해야 한다. 애초에 자기 욕망에 따라 설정된 목적지가 아니기에 더 나은 곳을 찾아 떠날수록 진정한 자신과는 멀어지고, 무력감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소설에서 라티프는 독일 국경에서 망명 신청을 한 뒤 영국의 소도시에 도착한 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 없이 몇 시간을 걷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항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쩌면 나는 그냥 다시 배에 올라 계속 나아가면서 결국 내가 어디에 도착하게 되나 봐야 할지도 몰랐다. 나의 운명에 맞닥뜨리게 될 때까지 나의 삶을 그렇게 살아가면서. 나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한 것은 두려움과 움츠러드는 의지였다. 나의 삶을 다른 누군가에게, 사건들에 떠맡기기. 하지만 항구에 돌아갔을 때 배는 이미 떠났고 내 여행은 끝나 있었다.(p. 225)

우리는 자유의지를 선택할 기회조차 박탈 당한 채 모든 것을 타인에, 운명에 맡기면서 자기 인생에서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지 않을까. 난민들이 처한 상황과 현실적인 배경도,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양과 질도 다르지만, 자신이 원하는 삶에서 소외되었다는 입장에서 생각하니 심리적인 유대감 같은 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대한 감각은 무엇일까. 소설에 이와 관련된 장면을 발견하고는 오아시스를 만난 듯 해당 대목을 연거푸 들이켰다:

해안으로 돌아가니 집에 온 듯한 기분이, 혹은 그 이상으로, 세상에서 내가 속한 자리가 바로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캄팔라에서 배운 것의 대부분은 과거를 짓밟아버리는 것, 내가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지,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자신감 속에 살았는지를 어렴풋이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어요. 해안으로 돌아오니 내가 결국에는 너그럽고 고귀한 무언가의 일부임을, 나의 일부였으며 내가 너무 성급하게 헛되고 조잡한 것으로 치부해버린 그 삶의 방식을 느낄 수 있었어요. (...) 어디를 가든 우리는 아들처럼 대접받았고 이런저런 환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누군가는 세푸가 누구인지 아는 듯했고, 심지어 세푸가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일 때도 그랬어요. 정말 놀라운 시간이었고, 어떤 곳에서든 사람들은 내게도 두 팔을 활짝 벌려주었어요. (p. 286-287)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안아주는 것을 느낄 때 몸도 마음도 영혼도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키워드는 ‘환대’였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지 않고, 외양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것!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에서는 진정한 환대는 서로가 서로의 자리를 인정해주는 것이라 설명하면서, 이를 증여와 대비시킨다. 증여는 상대로부터 물질적이든, 상대의 인정, 고마움과 같은 비물질적인 것이든 대가를 기대로 이루어진다. 반면, 환대는 대가에 대한 기대 없이 이루어지며, 결국 ‘주는 힘을 주는 것’이다. 흔히 사회적 약자로 일컬어지는 타인들에 과도한 웃음과 친절을 베풀기도 하는데, 이는 상대를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규정한 뒤 그들에게 유무형의 대가를 기대한 증여의 방식에 가까울 수도 있다. 소설에서도 레이철이 오마르를 갑자기 방문하여 강제로 운동화를 사주는 장면이나 완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장면에서도 환대의 탈을 쓴 증여가 언뜻 보였다.(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오마르와 레이철 사이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고, 이러한 행동이 더이상 강압적 친절이 아닌 시점에 도달하기도 했다.) 이와 달리 진정한 환대는 대가에 대한 기대 없이 표현되며, 대가에 대한 기대 없음은 같은 행위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표현되는 것으로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현실화된다면 딱 위에 인용된 장면과 같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본'이라는 거대한 기준으로 존재의 우열이 나뉘는 세상에서, 무조건적 환대가 요원한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바틀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하면 되는 걸까. 그에 대한 답은 오마르와 라티프 사이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었다. 라티프는 부모의 실체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알지 못한 채 적대감을 갖고 오마르를 만났다. 대화하기 전 그에게 오마르는 자신의 집안을 망하게 한 용서할 수 없는 자였다. 그럼에도 라티프가 오마르를 찾아가 이야기를 듣기로 결정한 것은 삶을 살면서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공백’ 때문이었다. 자신이 목격하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그 공백을 채울 수 없고, 이는 사는 내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없는 퍼즐을 갖고 있는 오마르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는 자기방어에서 비롯된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마르가 들려준 이야기는 자신의 공백을 채워줬고, 그는 오마르와의 첫 만남 이후 다음 번 만남에 대한 기대에 부푼다. 두번째 만남에서는 더욱 깊은 공백과 마주한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은 이야기를 마주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간중간 억누를 수 없는 화를 소심히 분출할지언정, 이야기를 피하지 않는다. 불편하지만 자신의 공백을 채워줄 이야기와 끝까지 마주하는 것, 반대로 상대의 참을 수 없는 화를 감수하고서라도 필요한 이야기를 끝까지 해내는 것, 둘의 대화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계속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서로에게 위안을 준다. 그리고 이 경험은 다음 번 만남에 대한 기대로 바뀐다. 긴 세월 동안 홀로 감당하느라 녹초가 되었지만, 상대의 이야기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 이는 비우호적인 주변 상황에 자신을 무력하게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두 당사자가 함께 노력하여 쟁취한 것이다.


물론 소설 속 대화에서는 라티프가 오마르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구도에 머무른 점이 아쉬웠다. 현실에서는 오마르 또한 자기 논리에 갇혀 바라보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그의 빈 조각은 라티프가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쌍방의 소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화(내지 독백)가 희열을 주는 것은 서로가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의 방어기제를 인지하고 이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서였다. 진실된 대화가 서로에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해하고 상대를 배려할 수 있는 태도를 취해야만 대화는 이어질 수 있다.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처음에는 고통스럽지만 회차를 거듭할수록 서로에게 채워지지 않은 공백을 메워주고, 깊은 위안을 주고, 무력한 상황을 무력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편을 택하도록 할 것이다. 그런 대화에 참여해본 사람만이 누군가를 무조건적으로 환대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가장 뼈아픈 진실에 맞서본 사람은 자신에 대한 열등감이 없다 (혹은 덜하다). 자신에게 우열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사람은 타인도 같은 방식으로 대할 수 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 환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결국 환대의 시작은 세상이 정한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에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용감하게 듣고, 상대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용감하게 해내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