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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리 Oct 28. 2022

'타인은 지옥'이라는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독서공동체를 통해 발견한, 관계의 '오래된 미래'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이 농담처럼 회자되는 것이 불편해졌다. 독서모임을 시작한 뒤 생긴 가장 큰 변화이다. 전형적인 내향인인 나는 타인과의 만남이나 집 밖에서의 활동에 소모되는 에너지가 큰 편이다. 어느 정도의 외부 활동 후에는 반드시 집에서 홀로 에너지를 채울 시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완전 방전 상황이 빈번할수록 배터리의 성능이 떨어지는 것처럼, 재충전의 시기가 오래 미뤄질 때마다 일상 회복도 더뎌지는 걸 느낀다. 한 번 크게 번아웃이 온 뒤부터는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과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피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내 안에 어떤 고정관념이 깊숙이 자리 잡았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것, 해롭다고 생각하는 관계는 최대한 빨리 잘라내야 한다는 것!


사회 전반적으로, 팬데믹 이후 철저해진 위생 개념은 관계의 영역까지 침투했다. 잠깐의 외부 노출에도 소독제를 뿌려 모든 세균을 전멸시키듯이, 마스크 착용이나 백신 접종으로 감염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듯이, 불편하거나 해가 될 것 같은 관계들이 감지되면 깨끗이 제거하는 ‘관계 위생’ 문화가 어색하지 않다. 유행하는 책이나 영상 콘텐츠 중 적지 않은 수가 불편한 관계를 끊어내어 자신을 보호하라는 메시지를 전파하고, 이런 관계들에 마음을 쏟는 것이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현명하지 못하다는 견해들도 자주 마주한다. 그럴 때면 내 마음 하나 지키는 게 세계 평화만큼이나 중요하게 느껴지곤 했다. (일면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관계에 의미를 두고,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데 적극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관계는 그 자체로 해악이어서 단칼에 끊어낼 수도 있어야 한다. 이 또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기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관계들은 불편한 상황을 감수하고서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끈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다. 튼튼한 동아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느다란 실의 형태로라도 명맥을 이어가야 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있다. 하지만 자기 위안을 최우선으로 삼는 메시지들은 본래 의도와 상관없이 관심을 이어가야 할 관계마저도 쉬이 부정하고 끊어내는 방식으로 유통되기도 한다. 다양한 심리 콘텐츠에서 제시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조언은 대개 전문 상담을 통해 특정 관계가 자신을 해치고 있다는 객관적인 문제 정의가 이뤄진 뒤에 적용될 수 있다. 취약한 심리 상태에서 자기 주관적인 진단을 내린 뒤 이런 부류의 조언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였을 때, 스스로를 더 큰 관계의 늪에 빠뜨릴 수도 있다. 그 늪은 바로 '완벽한 고립'일 것이다.


나 또한 오랫동안 이런 과정을 거쳐 고립을 자초했다. '고립'을 '고독'이라 우기며 자기 위안을 삼았는데,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고립을 조장하는 메커니즘을 깨닫고 나자, 완벽한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혼자 힘으로 출구를 찾기에 너무 멀리 와있었고, 도움을 요청하기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내게 독서모임은 지금껏 갖고 있던 관계의 토양에 새로운 씨앗 하나를 심어주었다. 그 씨앗이 품고 있는 메시지는 이러했다. 관계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며, 하나의 관계는 또 다른 관계에 빚지고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엔 완전히 쓸모없는 관계도, 완벽히 흠결 없는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관계가 수행해야 할 일은 그 관계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단 하나로도 충분했다.


한 달에 한 번, 우리는 클럽장님이 엄선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모여서 이야기를 나눴다. 클럽장님의 진행 아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물음을 던지고 함께 고민하고 답을 쌓아가며 자그마한 합의점들을 찾아갔다. 각자 읽은 소감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발제문에 제시된 질문들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는데, 한 번 점화된 불씨는 4시간을 거뜬히 타고도 화력이 남아 공식 토론 시간 이후로도 몇 시간을 이어갔다. 그렇게 모임을 마치고 나면 체력 소모가 큰 만큼 진이 빠지는 것 같았지만, 그 자리에는 기쁨이 충만했다. 한여름날 땀을 줄줄 흘리며 거리를 걷고 난 뒤 맛보는 시원하고 달짝지근한 아이스크림 같았다. 수분과 당분이 함께 보충되면서 내 안에 화창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람들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던 게 언제였을까. 직장에서는 일 이야기, 지인들과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의 험담이나 부동산, 주식 투자 이야기가 주를 이룬 지 오래였다. 누군가를 깎아내리거나 헐뜯지 않아도, 당장의 실효성이 없어 보여도, 그 자체로 힘을 줄 수 있는 대화가 있다니! 대화의 희열이란 이런 거구나, 아니 이런 거였지. 다른 매체도 아닌, 책을 매개로 맺어진 관계이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활자 기반 매체는 정보 전달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수용 과정에서 자기 경험은 물론, 사회 이슈, 인문학적 단상 등 다양한 생각을 자극한다. 모임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도 책을 매개로 상당히 깊은 속내까지 드러낼 수 있고, 진심 어린 이해와 응원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수십 년을 친구로 지낸 사이에도 터놓지 못한 이야기가,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심리적 허들 없이 풀려나오기도 한다.


처음에는 독서모임의 만족도가 높은 나머지 다른 관계들이 하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인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지금은 아니란 점도 강조하고 싶다...) 한 번은 소셜미디어로 맺어진 관계가 일상의 관계들을 치환하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원인이 ‘효용성’에 입각해서 관계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데서 비롯된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다. 소셜미디어에서 만나는, 이미 알고리즘으로 걸러져 비슷한 가치, 성향, 배경 등을 공유하는 관계들이 얼마나 허약한지, 사회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한 지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문득 머리 한 구석에 내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들의 스펙트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어떤 관계들은 오래 지속된 만큼 면치레하지 않고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만 내 안에 새롭게 꿈틀대는 정체성들을 공감받기는 어려웠다. 또 다른 관계들은 지향하는 가치가 비슷하여 현재의 고민들을 깊이 있게 나누고 이해받을 수 있었지만, 신생 관계인만큼 얼마나 지속될 지가 항상 아슬아슬했다. 그제야 비로소 하나의 관계에서 아쉬웠던 점이 다른 관계로 채워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다양한 층위의 관계들이 서로를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관점의 전환은 모든 관계에 깃든 고마움에 주목하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관계의 불편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어떤 관계는 이해할 수 없는 미궁에 갇혀 있다. 변화한 점이 있다면, 불편한 관계일지언정 아예 외면하거나 손절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금이라도 고마움이 스민 관계라면 좋은 점을 부풀려 보려고 애쓰기도 한다. 이런 노력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은 결국 내 생각과 감정을 풍요롭게 해주는 ‘독서공동체’가 있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책에서 만난 멋진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고 따뜻해진다.


이제 독서모임도 세 번째 시즌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 멤버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어느 정도의 맥락이 생겼고, 대화는 더욱 깊고 솔직해졌다. 대화에서 맛본 기쁨은 다음 책을 더욱 공들여 읽고, 자신의 감상을 공들여 쓰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렇다, 나는 다시 쓰기 시작했다! 책과 나의 세계를 엮어서 한 땀 한 땀 쓰기 시작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펜이 아니라 노트북 자판으로 쓰고, 혼자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클럽 멤버들과 공유한다는 것이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점차 나만의 스타일도 만들어졌다. 책 속 이야기들이, 일상에서 느낀 문제 인식이나 뉴스나 책, 영화 등 다른 매체에서 접한 기억 남는 이야기들과 엮이기 시작했다. 묻고 답하기를 지속하면서 내 안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일기 쓰기와도 닮았다. 정보 제공이 주목적이 아니기에 글의 형식은 자유롭게 유지할 수 있으면서도, 책 한 권을 통으로 읽으면서 체화된 생각들이 그간의 경험들과 어우러지면서 소재의 한계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무엇보다 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긴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 내가 독서클럽에서 얻는 만족도 언젠가는 낡은 방식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미 낡은 방식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관계의 유효기간은 좀 더 오래 지속될 거라고 믿는다. 매달 수천 권씩 쏟아져 나오는 책과 그 안의 다양한 생각들, 이를 활발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를 통해 쏟아지는 영감을 기록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내 성격은 점차 외연을 확장해가는 ‘선순환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가 쓰기 쉬운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감명 깊게 읽고도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서 첫 줄부터 애를 먹기도 하고, 어떤 책은 내용의 깊이나 논리적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워 다음 문장을 쓰기까지 수 분을 고민하기도 한다. 기대와 긴장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이야기의 향방이 결정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탄력을 받아 풀려나오고, 어느 순간 실타래가 풀린 뒤 남겨진 단단한 실패처럼 마지막 한 문장이 남는다. 이미 내 안에 있었으나, 이제는 다른 역사를 거쳐 마주하게 된 말. 결국은 이 한 줄을 새로 만나기 위해 긴긴 이야기를 써내려간 게 아닐까.


어떤 마지막 문장은 처음으로 돌아가 글 전체를 첫 문장부터 끈기 있게 읽게 하는 힘이 있다. 나에게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그랬다. 첫 회차를 보며 극에 몰입하지 못해 계속 보기를 중단했던 이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우연히 보게 됐다. 그러다가 극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염미정의 대사에 귀가 번쩍 뜨였다.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마음에 사랑밖에 없어. 그래서 느낄 게 사랑밖에 없어." 이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서 나는 드라마를 첫 회부터 다시 보게 됐다. 순응도, 반항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현실을 간신히 견뎌내는 것처럼 보였던 그녀가, 어떻게 저렇게 환한 미소로 자신을 가득 채운 사랑을 고백할 수 있게 된 걸까. 그 전모가 궁금해졌다. 결말이 아니라, 회차를 거듭하며 그녀가 거쳐온 역사를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렇게 다시 보게 된 <나의 해방일지>의 첫 회에서는 모든 장면이, 모든 대사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에 비하면 나의 마지막 문장은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부족할지언정, 내 인생의 한 구간 동안 마음을 다해 읽고 묻고 고민하고 대화하고 써내려간 만큼 지금의 내게는 최선의 응답이자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작은 희망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좋은 것은 나눌수록 더 좋아진다고 하지만, 내게 좋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파동을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의 마지막 문장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 내 글을 찬찬히, 끈기 있게 읽도록 유혹할 수 있길 조심스레 욕심내본다. 어떻게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을지 궁금해하면서. 그 여정을 짚어보면서 자기만의 답을 찾는 데 손톱만큼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욱 좋겠다. 자신만의 독서토론과 독서일기 쓰기의 연대 전선에 뛰어든다면 더더욱!


나에 대해 쓰고 싶지 않다면, 우리에 대해 쓰면 된다. 혼자 쓰고 싶지 않다면, 함께 써나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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