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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리 Oct 18. 2022

능력주의, 머리보다 마음으로
먼저 거부할 수 있길

『공정하다는 착각(마이클 샌델)』을 읽고

진정으로 ‘만드는 자'들이 일의 존엄성을 느끼고 존중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통해 ‘가져가는 자'가 아니라 ‘만드는 자'로 거듭 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본다.



한 공기업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뉴스에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조치’, ‘사회정의를 무너뜨리는 처사’라는 반응을 보였다. 똑같은 업무를 똑같이 수행해도 (심지어 더 잘 수행한다고 해도) 공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조직의 정규직으로 일할 ‘자격'이 없다. 반면, 시험에 통과했다는 이유 하나로 누군가는 중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평생 동안 고용 안정을 누릴 자격이 있다. 실상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크게 반발한다고 언급되는 집단 중에는 같은 직장 내의 정규직과 정규직이 되기를 희망하는 취업준비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정규직의 자격이 있고, 이를 존중하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말한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심정이 복잡미묘했다. 머리로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시험에 통과하지 않은 사람과 통과한 사람이 동일한 고용 ‘혜택'을 누린다는 데서 비롯되는 본능적인 불편함이 마음 한구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어찌 보면 이 문제는 심정적으로는 납득되지만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아야 마땅하다. 같은 직장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데 고용 형태, 임금, 복지 등에 차등을 두는 상황을 접할 때 인간적으로 가장 먼저 느껴질 감정은 부당함일 것이다. 이처럼 인간적임의 상식을 뒤엎은 상황의 중심에 사회 전반에 퍼져 강력한 도덕적 잣대로 둔갑한 ‘능력주의'가 있다.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가 ‘공동선'에 기반해 있다면, 같은 사회구성원을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동료로 인식하는 문화가 공고하다면, 나의 (혹의 우리 사회의) 본능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았을까.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미국에서 벌어진 다양한 정치경제적 상황, 유명인사들의 발언 등을 들어가며 그 밑바탕에 깔린 공고한 능력주의 체제를 비판한다. 사례는 다양하지만 이들이 제시하는 바는 동일하다. 능력주의는 승자를 오만하게, 패자를 굴욕적으로 만든다. 그 결과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패자들'(주로 대학 학력을 갖지 못한 비엘리트층)은 자신의 명예는 물론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반면 운 좋게도 승자의 위치를 점한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부와 지위가 오롯이 자신들의 노력에 따른 정당한 대가이며, 이를 ‘자격 없는' 자들과 나누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해법으로 제시된 고등교육 확대는, 대학을 나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신분 차이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을 뿐만 아니라, 고등교육을 거치지 않은 육체노동자들의 사회적 자존감마저 떨어뜨리는 데까지 이어졌다. 


이같은 ‘능력주의’의 문제는 이 체제가 겉보기에 매우 그럴싸하다는 것이다. 타고난 배경(집안, 인종, 성별 등)에 상관 없이 개인이 갖춘 능력만 보고 판단한다는 말은 과거 신분사회에 비하면 매우 정의롭게 느껴진다. 하지만 샌델은 이런 생각이 근본적으로 놓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한다. 능력 또한 타고난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능력이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적 상황까지 고려한다면, 순수하게 한 개인이 일군 능력이란, 그리고 이를 사회적 분배의 잣대로 삼기란 비현실적임을 알 수 있다. ‘운칠기삼'은 그저 자신의 겸손을 포장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 판단인 것이다. 그럼에도 엘리트층은 자신이 획득한 부와 지위에 작용한 운의 영향을 평가절하하며, 이를 주변과 나누는 데 인색하다. 오히려 자신을 시혜자로 두고 수혜자의 자격을 운운한다. 하지만 능력주의 사회에서 그들의 오만은 정당한 요구로 받아들여진 채 비난의 화살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쏠린다. 더 많은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요구할 수 있는, 즉 사회적 상승을 꾀할 수 있는 자격을 위해 대학의 문을 두드린다.


대학 입시에 관해서는 한국도 미국만큼, 아니 그 이상 할 말이 많다. 우리 사회에서 대입 문제는 사교육 과열, 서열화에 따른 치열한 경쟁, 획일적 잣대로 인한 교육의 질 하락 등 교육 문제에 그치지 않고, 수도권 집중 현상 강화, 가정 붕괴 등 다양한 사회 문제의 온상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핀란드 교육을 들며 경쟁에서 자유로운, 모두가 행복한 교육을 말하며 한국 교육을 부끄러워 하지만, 아주 잠시 한국교육이 ‘K-교육’으로 (살짝) 자랑스럽게 회자된 때도 있었다. (이는 K-POP이 급부상하기 전이었다…) 바로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열을 좋은 예로 들며 미국도 대학진학률을 높여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다.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이를 대서특필(까진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했고, 이를 접한 사람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국의 교육열의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했다. (물론 오래가지 않았다.) 이 뉴스를 접했을 당시 의아했는데, 책 속에 관련 사례가 담겨 있었다. 오바마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상승할 것을 바랐다. 마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의 메시지는 미 국민들에게 원래 의도했던 공정한 사회에 대해 기대와 희망보다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현 상황에 대한 자책과 비난을 자극했다. 샌델은 이를 두고 (특히 진보 성향의) 엘리트들의 오만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의 능력주의도 대학 입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샌델은 미국 사회에서 대졸과 비대졸의 차이로 인한 능력주의를 얘기했지만, 고등학생의 7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문제의 초점이 명문대 졸업생과 그 외 대학의 졸업생 간의 격차로 이동한다. 학력 인플레는 심화되지만 다수가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크게 줄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한국사회는 능력주의 신화가 붕괴되기 가장 좋은 조건일지도 모른다. 능력주의의 최전선에서도 능력주의의 열매를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대학 졸업장은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다, 자기만의 개성과 실력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고, 자본과 소비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노동과 생산을 중심에 두는 삶을 꾸리려는 사람들도 미약하게나마 늘고 있다. 요즘 주목 받는 ‘탈00’ 신조어(탈서울, 탈대학 등)는 더 이상 희망을 찾기 힘든 현실을 두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내뱉다가 유행이 된 말일수도 있지만, 의도와는 전혀 다른 사회양상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실제로도 조금씩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도들이 주목 받으면서 기존의 엘리트 중심, 정규직 중심, 수도권 중심의 문화가 완화되고 다양한 삶의 가치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물꼬가 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탄력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탄탄한 ‘공동선'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요즘 확대되고 있는 로컬 문화의 중심에 ‘공동체'가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공동선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완전히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진 사람들도 자신의 삶과 연관 짓는 노력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각자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촘촘한 연결망을 조망하기 위해서는 다른 배경에 있는 사람들과 더 많은 접촉이 필요하다. 실제 만남을 통한 직접 경험이든, 문학을 비롯한 여러 장르의 책을 매개로 한 간접 경험이든 간에 말이다.


더 나아가 샌델이 공동선의 잣대로 제시한 ‘기여적 정의'에도 주목하고 싶다. 즉, 노동의 가치를 매길 때 그 일이 사회적으로 어떤 기여를 하는지에 중심을 두며, 그 기준은 소비가 아닌 ‘생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롯이 자본을 불리는 데 쓰이는 노동은 사회에 필수적인 생산에 기여하는 노동보다 더 가치 있다고 여겨질 수 없다. 친환경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은 특정 기업의 부풀려진 실적을 매개로 투자자를 끌어모으는 일보다 사회 기여도가 높다. 사회 기여도가 높은 일에 더 많은 명예와 보상이 돌아가는 것이 기여적 정의이며, 이를 지켜야만 ‘일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는 주식, 부동산, 코인 등으로 막대한 부를 획득한 사례들 앞에서 노동의 의미가 무참히 짓밟힌 한국 사회에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만드는 자'들이 일의 존엄성을 느끼고 존중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통해 ‘가져가는 자'가 아니라 ‘만드는 자'로 거듭 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본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성장해온 나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원칙도 가슴보다 머리로 먼저 이해했다면,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머리보다 가슴으로 먼저 이해할 수 있기를, 거기에 내 일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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