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종류들(조르주 페렉)』을 읽고
도시와 시골, 그곳의 다양한 구역들, 그 안에 혈관처럼 나있는 거리 곳곳을 오래도록 걷고 싶다. 그러다 길가의 카페에 들어가 거리를 바라보고 앉아 오래오래 눈앞의 공간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싶다. 그렇게 내가 거치게 될, 축적된 공간의 힘으로 더 넓은 세계를 관찰하고 이해하고 싶다.
'정착'과 거리가 멀었던 탓인지, 나에게 '공간'이란 키워드는 오랫동안 관심 리스트의 상위권을 유지했다. 시작은 스무 살 되던 해 서울로 이주했을 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나고 자란 내게 서울 구경만큼 재미난 게 없었다. 남산, 63빌딩 같은 당시의 랜드마크보다는, 어릴 적부터 동경(?)했던 서울이란 공간의 땅덩이를 밟는 것 자체가 활력을 일으켰다. 일부러 대중교통이 끊길 시점까지 미적대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밤새 도보 여행을 할 때면, 다리 아픈 것도 잊은 채 반쯤 뜀뛰듯이 경쾌하게 도심을 가로질렀다. 정수복 작가의 『파리의 장소들』이란 책에서, 파리의 공기 중에는 ‘파리진(parisine)’이라는 연기 같은 성분이 있어 다양한 기억과 향수를 자극하고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감지하게 한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갓 상경한 나도 서울이 뿜어대는 기운들—활력 같은 것들—에 취해 늦은 밤 텅 빈 거리를 홀로 독차지한 것 같은 기분을 만끽했다. 아직 나에게 서울은 ‘집’이기 전에 ‘여행지’였던 것이다.
서울 거주 기간이 길어지면서 서울스럽지 않은 서울을 찾아 헤맸다. 남들이 다 아는 거리나 지형지물이 아니라, 나만 아는,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공간들을 찾아 헤맨 것이다. 나만의 공간을 찾으려는 모험은 서울에서도, 서울 밖에서도 계속되었다. 길을 나설 때마다 무조건 손바닥만 한 노트와 펜 한 자루를 챙겨 다녔다. 궁금한, 혹은 익숙한 구역을 찾아가 ‘정처 없이’ 걷고 걷다가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생각이 샘솟을 때면 어디든 터를 잡고 앉아 노트와 펜을 꺼내 ‘정처 없이’ 써내려갔다. 여기저기 주저앉아 쓰다보니 생긴 에피소드들도 있는데, 한 번은 북악산 바위에 걸터앉아 청와대를 내려다보면서 끄적이다가 보초병에게 신원 확인을 받은 적도… 있다. 이렇게 생긴 에피소드는 공간에 또 다른 기억을 축적하여 더욱 의미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내가 걷는 모든 공간이 곧 여행지였다. 하지만 이 여행지는 낯설다기보다는, 집처럼 익숙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조르주 페렉의 『공간의 종류들』에서 저자는 그의 사유가 기록되는 페이지부터 그를 둘러싼 우주까지 모든 공간을 새롭게 바라보며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간다. 특히 ‘거리’에 대한 사유는 앞서 설명한 경험과 맞물려서 그런지 더욱 와닿았다. 그는 우리가 실제로 보는 법을 잘 모른다면서 제대로 보는 법과 그 예시를 제시한다:
거의 어리석을 정도로, 더 천천히 접근해야 한다. 흥미롭지 않은 것, 가장 분명한 것, 가장 평범한 것,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적기 위해 노력하기.(p. 84)
그리고는 자신이 관찰한 거리의 풍경들—사람들, 자동차들, 상점들, 카페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리듬, 반대로 이 중 사소한 일부분의 세밀한 동선—을 묘사하고 분류하고 해독한다. 페렉은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낯선 도시에 있는 듯한 인상을 느낄 때까지” “장소 전체가 낯선 것이 되고 그것이 하나의 도시, 하나의 거리, 건물들, 보도들로 불린다는 것을 더 이상 알지 못할 때까지” 이런 시도를 계속하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일상을 여행으로 만드는 최고의 기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페렉이 제시한 공간의 재발견은 그저 장소의 인식에 그치지 않고 쓰는 행위와 결합되어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같은 장의 ‘장소들’이란 글에서 그는 파리에서 자신에게 의미 있는 공간 열두 곳을 정해 매달 서로 다른 두 곳을, 매번 서로 다른 조합으로, 매년 방문하여 관찰하고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총 12년이 예상되는 이 프로젝트의 의미에 대한 페렉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1981년이 되어야 비로소 이 계획의 결과인 288개의 텍스트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이 계획이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그 일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바로 삼중의 낡음에 대한 흔적이다. 장소 그 자체의 낡음, 내 기억들의 낡음, 나의 글쓰기의 낡음.
세월이 흐른 뒤 재발견되는, 한 공간에 축적된 ‘정확한 낡음,’ ‘독창적인 낡음’보다 더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기에 유용한 것이 있을까. 열두 군데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장소라도 매년 관찰일기를 이어가고 싶은 (위험한) 마음이 샘솟는다.
'도시'를 주제로 한 독서모임의 마지막 책으로 『공간의 종류들』을 읽은 경험은 내가 이 모임을 시작한 취지와 맞닿아있어 더욱 뜻깊었다.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도시가 서울이 되어버린 시점에, 서울로 형상화된 도시라는 공간을 두고 ‘왜 도시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솟구쳤던 시기에 이 클럽을 발견했다. 그리고 도시에서의 삶에 대한 마지막 재고라며 모임을 신청했다. 페렉의 책을 읽으면서 나를 둘러싼 공간을 입체적으로, 구체적으로, 철학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었다. 실제 가늠했다기보다는 가늠하는 법을 감지했다는 게 맞겠다. 특히 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생각들—방을 요일별로 나눈다거나 여러 도시나 구역에 머무른다거나, 호수로 수프를 끓이는 것을 상상하는 것들—은 공간에 나를 맞추는 데서 벗어나 공간 인식과 활용의 주체를 자신으로 탈바꿈하는 법을 일깨워줬다.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그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일 수 있으며, 다른 인식은 그저 바라보는 데만 있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관찰로 수합한 데이터를 기록하고 나열하고 분류하고 분석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여느 일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정성을 들일수록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페렉의 제안 중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고 결론 지은 것도 있다. 바로 코로나 이후 더욱 주목받는 ‘노마드 라이프'인데, 그는 인류의 정착문화에 문제를 제기하며 도시 곳곳에 요일별로 머무르는 장소를 마련하는 법이나 몇 년을 주기로 사는 곳을 바꾸는 것을 제안한다. 한때 이곳저곳 옮겨가며 사는 방식에 매료되어 소심하게 2년에 한 번씩 동네를 옮겨서 이사 다녔다. 경제활동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좋은 자극을 준다는 점에서 비용 대비 효과가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네 번째 사는 동네를 바꾸고서야 나는 노마드 라이프의 (나 개인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한계를 깨달았다. 거주지의 이동은 단순히 공간의 변화를 넘어 정체성의 변화를 동반했기 때문이다. 변화는 좋아하지만 그 주기가 너무 빨랐다. 이제는 대략 10년은 정 붙이고 살 동네를 원한다. 그저 어쩌다가, 사회 분위기 내지 압력 때문에 살게 된 도시보다는, 나만의 개성과 맥락, 가치와 철학을 실현해갈 수 있는 장소와 공간을 찾고 싶다.
페렉은 책을 마무리하면서, 시간에 의해, 또는 기억의 배반이나 망각에 의해 부서지고 말 자신의 공간들을 ‘안정되고, … 변함없고, 뿌리 깊은 장소들'을 향한 욕망과 대비시키면서, 자신에게 의미있는 공간들을 붙잡기 위한 방법으로 글쓰기를 언급한다. 그리고 그 방법을 “점점 깊어지는 공허로부터 몇몇 분명한 조각들을 끄집어내기, 어딘가에 하나의 홈, 하나의 흔적, 하나의 표시, 또는 몇 개의 기호들을 남기기(p. 153)”라고 말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누구나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맞아줄 수 있는, 기댈 수 있는, 자신을 설명해줄 수 있는, 자신의 ‘출발점이자 원천'과 같은 장소를 갖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도, 과거의 기억도, 현재의 생각도 바뀌게 마련이다. 시간 앞에 공간은 속수무책 마모되지만, 페이지 (다시 이 책의 첫 번째 공간인 ‘페이지'로 돌아간다) 위에 남긴 흔적들이 질료가 되어 공간과 그에 대한 기억을 지속시키는 힘이 발휘된다. 그런 점에서 나도 더욱 적극적으로 걷고 관찰하고 쓰고 싶다. 도시와 시골, 그곳의 다양한 구역들, 그 안에 혈관처럼 나있는 거리 곳곳을 오래도록 걷고 싶다. 그러다 길가의 카페에 들어가 (야외 테라스석이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거리를 바라보고 앉아 오래오래 눈앞의 공간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싶다. 그렇게 내가 거치게 될, 축적된 공간의 힘으로 더 넓은 세계를 관찰하고 이해하고 싶다.
이것을 위해 추가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부담스러울 만큼 집요한(?) 내 시선을 완벽히 가려줄 짙은 선글라스 정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