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제니오델)』을 읽고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맥락을 느껴보라.
그 경험이 주는 온기를 믿고 더욱 다채로운 온기에 눈뜨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 않을까.
타협을 모르는 언쟁이 연일 주요 뉴스를 도배하면서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몇몇 발언과 의혹에서 비롯된 단발적인 생각들이 신속히 소셜미디어에 도배되지만, 어떤 이슈도 깊이 있게 논의되지 못한 채 또 다른 자극적인 사안으로 대체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사회 전체가 소모적인 갈등의 무한루프에 갇힌 듯하다. 이 같은 현상이 극화된 배경에는 ‘알고리즘’이 빠질 수 없을 것이다. 같은 플랫폼에서도 알고리즘의 장벽으로 갈라진 서로 다른 집단이 제대로 된 소통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동일 집단 내에서의 공허한 공감에 의지하며 타 집단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대상으로 규정하며 ‘나-그것 관계'를 심화시켰다. ('나-그것 관계(I-It Relationship)'는 상대를 사물처럼 기능적 효용에 입각해 대하는 관계로, 이때 상대는 다른 대상으로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된다. 반대되는 개념은 '나-너 관계(I-Thou Relationship)'로, 이는 상호 대화와 이해를 기반으로 한 대체 불가능한 관계이다.)
사전에 갈등의 여지가 차단된 대상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는 현상은 소셜미디어를 넘어 현실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기 중심의 협소한 세계도 소셜미디어에서는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동지’들과 연결될 수 있기에 현실 속 관계들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 피로감만 주는 관계로 소외되었다. 이처럼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에 공감을 표현하는 대상은 늘었지만 우리는 어느 때보다 깊은 공허함을 느낀다. 나는 그 이유를 이 책에 인용된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속 한 구절에서 찾았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라는 대형 재난을 겪은 지역주민은 이웃들 간에 서로를 돌보며 함께 위기를 헤쳐가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이웃을 향한 되돌릴 수 없는 관심의 확장’을 경험한 한 주민은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 용맹함이나 강인함도, 새로 지은 도시도 아닌, 새로운 포용에서 나오는 달콤한 기쁨. 타인과 함께하는 즐거움.
타인과 함께하는 즐거움! 이 말을 곱씹는 내내 가슴 깊은 곳에서 뜻 모를 일렁임이 느껴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소통하고 교류하며 때로는 갈등하고 반목하다 다시 화해하는 방식은 효율적인 알고리즘이 선사하는 안락함으로 인해 점차 열등한 방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자신의 상황과 생각에 (좋아요 버튼과 호의적인 댓글로) 공감해줄 대상이 이렇게 많은데, 비효율적인 관계를 유지하느라 애쓰는 것은 자원과 기회의 낭비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이로써 우리는 현실에서도,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가상 세계에서도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들과 ‘제대로’ 소통하는 법을 잊고 있다. 더 이상 관심 기울이지 않기를 선택하고 있다. 그나마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생각들은 마주칠 수라도 있지만, 그 사이 수많은 틈새들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생각과 대안들은 접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못한다. 문제 해결의 단서가 되는 생각은 대부분 양극단이 아닌, 그 틈새에 존재하는데 말이다.
저자가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알고리즘과 무관한 음악에서 새로운 취향을 발견했던 즐거움을 언급했다면, 나는 종이 신문을 읽으면서 낯선, 그래서 기피 영역이었던 문화나 과학 분야 등으로 관심을 확장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가 관심을 둔 분야에 대해서는 깊어질 수 있으나 (그리고 깊어지는 것처럼 착각하는 데에서 오는 단단한 자아정체성이 주는 안정감도 있지만), 익숙한 분야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영역으로 확장하거나 미지의 영역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놀라움을 접하기는 어려워졌다. 그래서 뉴스피드에 올라온 글을 읽고 읽어도, (알고리즘의 영향을 받았을) 추천 콘텐츠를 허겁지겁 챙겨 보아도, 갈증은 심해진다. 갈증을 유발하는 악순환의 메커니즘에서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 수 있을까?
저자는 ‘생태 지역주의’에서 답을 구한다. 우리가 발 붙이고 있는 지역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 이 공간의 오랜 역사와 그에 따른 변화, 공간을 이루고 있는, 혹은 있었으나 현재는 소멸한 모든 존재를 인내심을 갖고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 생산성의 늪에서 벗어나 더욱 다채로운 존재에 충분한 시간을 들이며 관심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가 제시한 ‘자연 속에 홀로 있다’는 인식의 함정을 짚어본다. 자신 외의 다른 '인간'이 없는 곳은 아무 존재도 없다고 속단하며 자신을 둘러싼 모든 대상과 교감하지 못하는 것, 오히려 자아의 성벽을 쌓고 모든 존재를 자아의 협소한 시선에 가두어 바라보는 것, 이러한 태도가 결국 ‘개발과 성장은 절대적으로 유익한 것’이라는 위험한 발상과 편견을 조장하고 공고화하지 않았을까.
‘동물권’을 이야기하면서 권리의 대상을 ‘고통을 느끼는 대상들’로 한정 짓는 것의 위험성을 언급한 지점에서는 뜨끔하기도 했다. 고통을 느끼는 대상으로 권리 대상을 제한했을 경우 그 여집합에 해당하는 존재들을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망각하고 배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맥락을 다양하고 깊이 있게 인식하고 내면화하여 실천하는 데 한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인식의 범주에 제한을 두려는 본능에서 인식 밖의 무한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의 이동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현실로 시선을 옮기면, 생태 지역주의는 소셜미디어가 제공하는 즉각적인 연결성, 확장성, 용이성 앞에서 무력하고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나 또한 이론적으로는 백번도 더 공감하지만, 이런 태도가 현대 사회의 관계 단절과 공동체 붕괴를 해결하거나 완화하는 데 얼마나 유효할지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하지만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과거 경험을 돌아본다면 생태 지역주의의 '추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이 비록 단편적인, 일회성 경험에 그칠지라도...) 내 추억은 숲 속 캠핑장에서 맞은 아침 풍경에서 찾을 수 있었다. 동트기 전부터 텐트 앞에서 종알거리던 새 한 마리에 대한 관심이 그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른 새들로, 그들에게 최고의 놀이터를 제공하던 키 높은 잣나무들로, 잣나무들 아래로 가지를 올려 싹을 띄우던 아기 나무들로, 그 아래 피어난 이름 모를 풀들로,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본 하늘에서 쏟아지던 햇살과 산 능선을 따라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바람으로 이어졌고, 이 모든 존재들과 함께 있다는 인식에 어느 때보다 큰 위안을 느꼈다.
숲에서 맞은 아침 이후 내 삶에도 돌이킬 수 없는, 유의미한 맥락 하나가 생겨나지 않았을까. 그러한 강렬한 경험에 비해 소셜미디어에서 받은 ‘좋아요’는 나에게 어떠한 추억도, 지속적인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만큼 얼마나 황폐한가. 이렇게 선명하게 대비되는 경험은 나에게만 국한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탁 트인 자연 속에 자신을 푹 담가본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당장 떠오르는 경험이 없다면, 당장 고개를 들어 드넓게 펼쳐진 하늘을, 거리에 줄지어 선 나무들을, 그 가지 위에 앉아 흥얼거리는 새들을 바라보면 어떨까.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맥락을 느껴보라. 그 경험이 주는 온기를 믿고 더욱 다채로운 온기에 눈뜨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 않을까.